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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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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7

제 107 편.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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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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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7편 – 대한성서공회

[시편 107:1 ]. 책갈피. 개역개정 제오권 제 107 편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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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7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시편 107. 107. 1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 같이 말할찌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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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7편 & 성경주석 – BIBLE STORY

시 107편은 시편의 제5권을 시작하는 시이다. 시적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이 시는 그 어느 문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빼어난 작품의 위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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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7편 주해와 적용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라 이 성 훈 남부성결교회 담임 목사 본문의 개요 시편 107편은 시편의 문맥상 제 5권의 시작을 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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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7편 (개역개정) – 04:43.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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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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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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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7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3 동서 1)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4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3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4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16 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17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18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19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2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22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

23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24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25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27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28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30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3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32 백성의 모임에서 그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그를 찬송할지로다

33 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34 그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아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시며

35 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

36 주린 자들로 거기에 살게 하사 그들이 거주할 성읍을 준비하게 하시고

37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38 또 복을 주사 그들이 크게 번성하게 하시고 그의 가축이 감소하지 아니하게 하실지라도

39 다시 압박과 재난과 우환을 통하여 그들의 수를 줄이시며 낮추시는도다

40 여호와께서 고관들에게는 능욕을 쏟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하게 하시나

41 궁핍한 자는 그의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시고 그의 가족을 양 떼 같이 지켜 주시나니

42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43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제 107 편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3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바다에서

4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 사슬 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3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4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16 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17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18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19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2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22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

23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24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 에서 보나니

25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27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28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30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3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32 백성의 모임에서 그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그를 찬송할지로다

33 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34 그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아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시며

35 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

36 주린 자들로 거기에 살게 하사 그들이 거주할 성읍을 준비하게 하시고

37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38 또 복을 주사 그들이 크게 번성하게 하시고 그의 가축이 감소하지 아니하게 하실지라도

39 다시 압박과 재난과 우환을 통하여 그들의 수를 줄이시며 낮추시는도다

40 여호와께서 고관들에게는 능욕을 쏟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하게 하시나

41 궁핍한 자는 그의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시고 그의 가족을 양 떼 같이 지켜 주시나니

42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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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 같이 말할찌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3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4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 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3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4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16 저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17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18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19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20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2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22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 행사를 선포할찌로다 23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24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나니 25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27 저희가 이리 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28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30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3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32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찌로다 33 여호와께서는 강을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으로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시편 107편 & 성경주석

<시편 107편 서론>

시 107편은 시편의 제5권을 시작하는 시이다. 시적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이 시는 그 어느 문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빼어난 작품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 구성이 매우 독특하여 답가로 부르기 위한 의도로 쓰여진 것임이 분명하다. 각 연(聯)은 대칭 구조로 되어 있다. 맨 먼저 하나의 재난을 묘사하고, 그 다음에는 구조를 요청하는 아우성, 이어서 즉각적인 응답이 뒤따른다. 그 다음에는 그 요청에 대한 이유와 함께 감사기도를 드리자는 요청이 이어진다. 약간씩의 변화를 준 이중 후렴은 매우 인상적이다(참조 6~9, 13~16, 19~22, 28~32절). 구속함을 입은 자들에게 여호와를 찬송하자는 노래의 도입부(導入部, 1~3절)를 지나면, 시인은 네 개의 인상적인 시상(詩想)을 네 연(聯)에 담아 순서적으로 제시한다.

첫 번째 연(4~9절)에서는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들을 자상하게 돌보는 하나님을 노래한다. 두 번째 연(10~16절)에서는 갇힌 자들을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세 번째 연(17~22절)에서는 하나님을 위대한 치료자로 제시하고, 네 번째 연(23~32절)에서는 하나님을 바다를 다스리는 분으로 나타낸다. 이 지점에 와서 시의 문학적 구조가 달라진다. 33~42절은 의인들에게 임하는 축복과 악인들의 몫인 저주에 관해서 말한다. 이 시는여호와의 인자하심(43절)을 더 잘 깨닫기 위하여 지혜 있는 자들에게 지금까지 제시된 사실들을 묵상하라는 호소로 끝맺는다.

<시편 107편 개역한글>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 같이 말할찌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3.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4.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 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3.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4.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16. 저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17.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18.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19.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20.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2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22.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 행사를 선포할찌로다

23.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24.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나니

25.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27. 저희가 이리 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28.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30.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3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32.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찌로다

33. 여호와께서는 강을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으로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34. 그 거민의 악을 인하여 옥토로 염밭이 되게 하시며

35. 또 광야를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으로 샘물이 되게 하시고

36. 주린 자로 거기 거하게 하사 저희로 거할 성을 예비케 하시고

37.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소산을 취케 하시며

38. 또 복을 주사 저희로 크게 번성케 하시고 그 가축이 감소치 않게 하실지라도

39. 다시 압박과 곤란과 우환을 인하여 저희로 감소하여 비굴하게 하시는도다

40. 여호와께서는 방백들에게 능욕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케 하시나

41. 궁핍한 자는 곤란에서 높이 드시고 그 가족을 양무리 같게 하시나니

42.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악인은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43. 지혜 있는 자들은 이 일에 주의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시편 107편 성경주석>

107:1 감사하라.

사람들을 향하여 여호와 찬양의 합창 속에 그들의 목소리를 높여 함께 노래하자고 권하는 일반적인 요청이다. 이 일은 지극히 작은 자까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에 대한 보답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찬양은 하나님을 매우 기쁘시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목소리를 높여 기쁨의 노래들을 자주 불러야 한다.

107:1 선하시며.

히브리어 토브(t.ob). 선하심은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들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하실 뿐 아니라 모든 선한 것이 흘러나오는 원천이기도 하다.

107:1 그 인자하심이.

히브리어 헤세드(h.esed), “거룩한 사랑”(참조 시 36편에 대한 추가적 설명).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항상 그를 따르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참조 시 23:6 주석). 삶의 모든 쓰라린 환경 속에서 크신 하나님의 가슴이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과 친절과 부드러운 동정심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아는 것은 위로가 된다.

107:2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할지어다.

죄로 인해서 인간은 스스로를 마귀에게 팔아버렸다. 그러나 하늘은 그들을 다시 사기 위해서 무한한 값을 치렀다. 만 백성 가운데서 구속함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말할 만한 가장 큰 이유를 갖고 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면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는 만큼 더욱 깊어질 것이다.

107:3 모으셨도다.

구속의 기별은 땅의 모든 어두운 구석구석까지 다 전해질 것이며,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으로부터 사람들이 나와서 기쁜 마음으로 이에 응할 것이다(참조 마 24:14; 계 14:6~12).

107:4 저희가…방황하며.

이것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에 관한 말이다. 우리 역시 순례자들이고 여기에 영원히 거할 도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전지하신 하나님의 인도 아래 있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할 것이며 마침내 우리를 하늘 도성으로 데려 갈 것이다(참조 히 11:10).

107:5 그 영혼이…피곤하였도다.

그들의 어려운 형편을 생생하게 그려낸 그림이다. 그들의 불행한 환경 때문에 절망감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러한 상태는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기뻐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을 의지하노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낙담은 죄요 불합리한 감정이다”.

107:6 저희가…부르짖으매.

이 후렴은 이 시 전체를 통해 흐른다(13, 19, 28절). 사람들은 고통 중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을 향해서 울부짖었다. 그들이 극도의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기도하기 시작했다(참조 삿 3:9 주석).

107:7 바른 길.

문자적으로 “곧은 길”, “평탄한 길.” 바른 길은 곧은 길이며, 죄의 길은 구부러진 길이다. 바른 길은 우리의 영원한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가장 쉬운 길이다.

107:8 인생에게.

여기서 시인은 자신과 함께 구속주되신 분을 열렬히 찬양하자고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구원해 내기 위해서 행한 일을 회고해 볼 때, 만약 우리를 위해서 그처럼 놀랍게 역사하신 그분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일에 우리의 목소리를 합하지 않는다면 확실히 우리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자들이 될 것이다.

107:9 저가…만족케 하시며.

광야에서도 이스라엘의 필요는 공급되었다. 하나님은 견고한 반석을 열어서 그들에게 물을 공급해 주셨고 하늘에서 그들에게 먹을 양식을 내려 주셨다. 그와 동일한 하나님이 아직도 살아 계신다. 그분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만족케 하실 것이다(마 5:6). 그분은 그 어떤 사람도 결코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신다.

107:10 흑암과…앉으며.

시 23:4 주석. 고대의 감옥들은 대개 둥근 아치 모양의 천장을 한 지하 감옥이었고, 거기 갇힌 자들의 손과 발은 쇠고랑이나 차꼬에 채워져 있었다. 이 음침하고 어두운 감방에서 죄수들은 선고 공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크신 구속주가 오셔서 감옥 문들을 열고 모든 아담의 후손을 해방시키기 전의 그들의 모습을 그려 놓은 그림이다. 구속주의 일은 감옥 문을 열고 매여 있는 자들을 풀어 주고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다(참조 사 61:1; 눅 4:17, 18).

107:10 사망의 그늘.

참조 시 23:4 주석.

107:11 뜻을 멸시함이라.

그들은 불순종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였다. 개인이나 국가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고 그분께 불충성할 때 그들은 곤혹과 불행을 자초한다.

107:13 이에 저희가…부르짖으매.

우리가 의지할 만한 이 땅의 방책들이 바닥나고 하나님께 호소할 때, 그분이 대답하지 않는 때는 단 한 번도 없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거듭거듭 전쟁에서 패하고 대적에게 복속되었으나 그들이 여호와께 도움을 청하자마자 그분은 구원자를 일으켜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삿 3:7~9, 12~15; 4:1~4; 6:1~14 등).

107:14 사망의 그늘.

참조 시 23:4 주석.

107:16 놋문.

곧 “구리 혹은 청동 문”(참조 출 25:3 주석). 옛날에는 성읍의 문들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통상적으로 문에 두꺼운 쇠와 구리판을 입혔다. 이것은 적군에 대한 방어용이었다. 그러나 놋문들이나 쇠빗장들은 어떤 성읍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택하신 사람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참조 사 45:2).

107:17 범과와…의 연고로.

문자적으로 “그들의 범죄의 길로부터”인데 그 의미는 고집스럽게 악의 길로 달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107:17 곤난을 당하매.

죄는 거기에 빠지는 사람에게 고통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한순간의 거짓된 쾌락을 약속할지 모르나 결국 고통과 근심을 가져온다.

107:18 저희 혼이…싫어하여.

참조 욥 33:20~22. 미련한 자(17절)는 자신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그 결과 그들은 으스스한 무덤 문에 가까이 이르게 된다.

107:19 이에 저희가…부르짖으매.

크신 의원께서는 가장 연약한 자의 속삭이는 소리도 들으시고 즉시 구조대를 파송한다.

107:20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하늘들과 모든 천군을 만드셨다(참조 시 33:6 주석). 말씀은 주린 영혼에게는 만나가 되고 영적 생명을 유지하는 근원이 된다(참조 렘 15:16; 마 4:4). 그 말씀의 더욱 충만한 계시가 그리스도 안에 드러났다. 그는 생명의 말씀이요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 분이다(요 1:14).

107:21 인생에게.

참조 8절 주석. 어찌 우리 인생이 그러한 의원(醫員), 그러한 생명의 시여자, 그러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인생들을 위해서 그처럼 많은 것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해서 그들이 그분의 인자하심을 잊어버리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주께서 팔레스타인 땅을 두루 다니면서 온갖 종류의 환자들을 치료하셨을 때 그는 계속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하고 주께서는 물으셨다. 단지 한 사람의 문둥병자만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왔는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눅 17:15~18).

107:22 감사제를 드리며.

히브리어 토다(todah), 감사의 노래. 이 노래를 죄를 거부하는 말과 함께 부를 때 그것은 죄를 자복하는 것을 나타낸다. 짐승을 희생으로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지한 헌신과 함께 드려야 하였다(참조 사 1:11; 렘 6:19, 20).

107:23 바다에.

23~30절에서 시인은 바다에서 이는 폭풍을 묘사한다. 갑자기 폭풍이 휘몰아쳐 작은 배가 파도 위를 오르내린다. 사공들은 공포 속으로 빠져들고 생명은 위태롭게 된다.

107:24 그의 기사를 바다에서.

사공들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배울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갖게 된다. 거대한 바다를 다스리고 성난 파도를 향해 말씀하는 바로 그분이 우리를 바다 건너편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이다.

107:25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하나님은 창조주이기 때문에, 천연계의 모든 힘과 법칙들은 그의 명령에 복종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자연의 재화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

107:26 그 영혼이 녹는도다.

사공들은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두렵다. 해변에 다다를 것이라는 희망은 모두 다 사라졌다.

107:27 지각이 혼돈하도다.

문자적으로 “그들의 모든 지혜가 지리멸렬한 것으로 드러났다.” 항해사들이 갖고 있는 기술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고,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파도의 주인이신 분께 호소하는 것뿐이다.

107:28 이에 저희가…부르짖으매.

하나님을 향한 사공들의 부르짖음은 성난 파도 소리를 뚫고 하늘에 상달되고, 폭풍은 순식간에 잔잔해진다.

107:29 평정히.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다. 그가 풍랑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는 것처럼, 오늘날 인생의 뱃길에서 폭풍을 만나 큰 파도에 내던져진 사공들에게 평화를 속삭일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삶의 험난하고 무서운 파도 소리를 뚫고 저 위에서 들려오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107:30 소원의 항구.

우리를 우리의 기쁨의 안식처인 하늘 항구에 안전하게 인도하실 선장께서 키를 잡고 계신다. “아, 해변 그리고 그 해변, 곧 하늘에 발을 내딛을 것을 그려보라. 또한 펼쳐진 손, 곧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것을 상상해 보라.”

107:31 인생에게.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권하는 네 번째 권면(참조 8, 15, 21절 주석).

107:32 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자주 자주 교회에서 들려야 한다. 바로 여기서 이 시는 그 형식을 달리한다. 지금까지 나온 네 개의 연(聯)에서 두드러졌던 후렴이 이 시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나오지 않고, 시인은 하나님이 의인들과 악인들을 대하는 방법들을 대조하고 있다.

107:33 광야가 되게 하시며.

관개가 잘 되고 비옥하던 땅이 그곳 거민의 죄악으로 인해 광야가 되고 불모의 땅이 된다.

107:34 염밭.

히브리어 믈레하(meleh.ah), “소금기 있는 땅”, “소금기 있는 토지.” 원수가 어떤 지역을 망쳐 불모의 땅을 만들고자 할 때 그는 거기에 소금을 뿌렸다(참조 삿 9:45; 창 19:24~28).

107:36 주린 자로 거기 거하게 하사.

주와 함께하는 자에게는 궁핍함이 없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반드시 공급받게 될 것이다.

107:37 소산.

하나님은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과 협력한다.

107:39 감소하여(minished).

“감하다”, “줄이다”라는 뜻을 가진 엣 영어이다. 하나님을 소산을 내는 분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그들의 물질적 성공을 자랑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궁핍으로 그들을 낮추신다.

107:40 능욕을 부으시고.

땅의 권세 있는 자들의 운명이 바뀌는 것을 보고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단 4:17) 인정하게 된다.

107:41 높이.

방백들의 경험과(40절) 가난하고 비천하던 자들이 높임받는 경험을 대조한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높임받지 못하던 자들이 번성하게 된다.

107:42 정직한 자는 보고.

하나님이 섭리하고 계신다는 많은 증거는 의인들의 주목을 끈다. 그리고 믿음이 그들의 미래를 밝히 비춰 준다. 이에 반하여 악인들은 의심과 당혹감 속에 남아 있게 된다.

107:43 지혜 있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은 흔히 눈앞의 환경들만 보고 “심중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시 14:1)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놀라운 이 시 속에 묘사된 하나님, 곧 의인들과 악인들을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하지만 그러한 지혜는 땅에서 난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내려 주는 것이며, 믿음으로 그것을 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약 1:5).

107:43 깨달으리로다.

그러한 깨달음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연약함과 사악함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의 크신 인자하심을 붙잡음으로 시작될 것이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6권

매일말씀묵상. 6월 15일. 시편 107편. > 매일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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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7 편 .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는 사람의 찬송 .

1. 시편의 제 5 권이 시작됩니다 . 107 편은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을 여러 가지로 비유하면서 , 그 모든 상황에서 인자하심과 기이하심을 보이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시입니다 . 거친 광야에서 길을 잃은 자 같았던 이스라엘 백성(4~9), 쇠사슬에 묶인 죄수 같았던 상황(10~16), 병든 사람처럼 죽음을 기다리던 모습(17~22), 폭풍에 시달리는 선원들과 같은 형편(23~32)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읽으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바로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시편 기자가 고백하고 찬송하듯이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한다”고 말하도록 도전을 받게 됩니다(8,15,21,31). 시편을 읽을 때마다 시인들이 고백하는 한결같은 내용은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은 영원하심이로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가슴 깊은 곳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2.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 40 년을 보냈습니다 . 시인은 그 때를 떠올리며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합니다(4~9). 그들은 목적지를 찾지 못해 방황했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영혼은 피곤했었습니다(4~5).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고통에서 그들을 건지셨고 바른 길로 인도하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습니다(6~7). 시인은 그 고생을 주목하지 않고, 고생을 마치고 마침내 거할 성에 이르게 하신 은혜를 찬송합니다. 시인이 경험한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 주린 영혼을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9).

3. 이스라엘은 또 쇠사슬에 매인 죄수와 같은 역사를 경험하였습니다 (10~16). 애굽의 종살이 뿐 아니라, 바벨론으로 포로 생활을 겪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11). 그래서 하나님은 수고와 고생으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습니다(12). 하나님은 돕는 자가 없을 때까지 그들을 낮추셨습니다. 그래야 죄인이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13). 하나님은 아무도 도울 수 없다고 절망하고 낮아진 인생을 찾아와 구원하십니다(13~14). 아무도 깰 수 없다고 생각했던 놋으로 만든 문을 깨뜨리시고, 쇠로 된 빗장을 꺾으심으로써 말입니다(16). 이러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기이하심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 죽음을 기다리는 병든 자와 같은 형편이 , 또한 이스라엘이 경험한 역사였습니다 (17~22). 왜 이런 고생을 했습니까? 죄악과 악행 때문입니다(17).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들을 고치시는 방법이 놀랍습니다. 말씀을 보내 저들을 고치시는 것입니다(20).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최고의 치료약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경험했고 시편 119편은 바로 그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찬송입니다.

5. 끝으로 시인은 바다에서 항해하며 , 풍랑으로 고생하는 선원의 상황을 상정합니다 (23~32). 이스라엘 사람들은 항해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바다는 신비로운 영역, 하나님의 행사와 기적을 보는 곳으로 여겨졌습니다(24). 하나님께서 광풍을 일으키시자 배는 파도를 따라 하늘까지 올라갔다가(시적 표현이다) 깊은 곳으로 내려갑니다(25~26). 뱃사람들은 이리 저리 구르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27~28). 하나님은 광풍과 물결을 잔잔케 하셔서 그들을 건지십니다(29). 그리고 그들은 평온한 중에 원하던 항구에 어느 새 도착하게 됩니다(30).

6. 시인은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묘사합니다 (33~42). 하나님은 강을 광야로 , 샘을 마른 땅으로 , 옥토를 염전으로 만드는 분이십니다 (33~34). 이뿐입니까 ! 반대로 광야를 못이 되게 하고 , 마른 땅에서 샘물이 나게 하시고 , 주린 자가 거할 성이 되셔서 , 풍성한 것을 얻고 누리게 하는 분이십니다 (35~38). 그러나 그러다가도 다시 압박과 재난과 우환을 주기도 하십니다(39~40). 이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골라내시고, 양의 무리 같이 인도하시며 보호하십니다(41). 고난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게 하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별해내는 도구입니다. 광야에서, 사슬에 묶여서, 병고로 인하여, 그리고 풍랑 이는 바다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연단하고 구별해내는 분이십니다.

7. 시인은 이 이야기를 하나의 교훈으로 삼아 권면합니다.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지혜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2~43).” 인생에 광야가 있다고 해서 , 답답한 시절이 있다고 해서 , 질병이 심하다고 해서 , 풍랑이 많다고 해서 하나님께 불평하지 마십시오 . 도리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 우리를 은혜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고 , 시인과 같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을 인하여 찬송하십시오 . 오늘 불평하다가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내일 부끄러워질 수 있습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고해(苦海)와 같은 세상을 살면서, 저희가 겪는 모든 고난과 역경이 저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저희를 낮추고 저희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줄을 다시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저희를 은혜의 항구로 인도하시니 감사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송하면서, 오늘 불평과 원망 대신, 감사와 기쁨과 만족으로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면서 찬송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시편 107편 주해와 적용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라

이 성 훈 남부성결교회 담임 목사

본문의 개요

시편 107편은 시편의 문맥상 제 5권의 시작을 구성하고 있다. 이 시편의 ‘헤세드’(인자)는 시편 5권에서 핵심용어로 대두된다(107:1, 8, 15, 21, 31, 43). 104~107편은 주제에 있어서 일련의 관련성이 있는데 시편 104편은 창조를, 시편 105편은 족장들 시대에서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 정복 등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기사를 언급하며, 시편 106편은 애굽, 광야, 약속의 땅에서의 사사시대 생활에 이르는 이스라엘 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어서 시편 107편은 포로 이후 회복에 관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

특히 시편 106편과 107편은 주제에 관한 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시편 106편은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과, 다시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되리라는 점을 언급한다. 한편, 107편에서는 사방에서 흩어진 자들을 하나님께서 모으신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시편 106편과 107편이 서로 유기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본문 주해

1. 제1연: 서론(1~3절)

전체 서론 역할을 하고 있으며, 1연은 결론적 진술이라고 할 수 있는 43절과 함께 이 시를 둘러싸고 있다.

4~32절은 구체적 사건들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33~42절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묘사다.

2. 제2연: 광야에서 체험한 구원(4~9절)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랑한 것을 묘사하고 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통해 광야에서 길 잃을 염려를 할 필요는 없었다. 제2연에서의 “광야”(4~9절), “흑암”(10~16절), “질병”(17~22절), “바다”(23~32절) 등에 관한 언급은 인간이 처한 극한 상황을 묘사한다.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했다’(4절)는 것은 사람 사는 성읍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사막에서 방황하며 사람 사는 성읍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짖고 회개할 때, 하나님은 저들을 “바른 길”(7절)로 인도하셔서 사람 사는 성읍에 이르게 하셨다.

모든 인생들은 ‘그분의 인자’와 ‘그분의 기이한 일들’(8절)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데, 광야에서 방황하던 자들에게 하나님의 인자는 ‘길을 보이사 그 길을 걷게 하신 일’을 가리킨다.

3. 제3연: 흑암에서의 하나님의 선하심 체험(10~16절)

제2연에서 ‘광야에서의 구원’ 체험에 이어, 3연의 무대는 ‘흑암’(10절)으로 바뀌었다. 제3연에서 언급된 사람들은 쇠고랑을 차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앉아 한숨짓는 자들로서, 삼손이나 여호야긴 왕과 같이 깊은 좌절의 수렁에 빠진 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말씀을 거역하고 그분의 뜻을 멸시하는 행위를 일삼으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 행위를 하는 이들이다.

3연에서 언급하는 문제를 통해 결국 인생의 문제라는 것은 무대만 약간 바뀔 뿐, 근본 문제는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 역시 회개하고 부르짖는 방법뿐이다. 우상숭배의 죄와 더불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켰던 므낫세 같은 왕도 앗시리아군에 사로잡혀 쇠사슬에 결박당하여 바벨론에 끌려간 후 환란 중에 여호와께 간구하고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기도할 때, 그를 다시 왕위에 앉히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흑암에서 이끌어 내셨다.

이와 같이 인생의 문제는 여러 종류지만, 인생의 문제에 대한 권면은 동일하다. 2연에서 광야에서 길을 잃고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향한 배부름과 해갈의 은혜로 인하여 찬양하였다면, 3연에서는 놋 문을 깨뜨리시고 쇠 빗장을 부수고 해방시키시는 하나님께 찬양하고 있다.

4. 제4연: 질병에서의 하나님 선하심 체험(17~22절)

광야나 흑암에서의 고통보다는 질병 같은 것으로 인한 고통이 보다 보편적인 현상일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질병의 질고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하심으로 질병에서 회복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한다.

5. 제5연: 바다 광풍에서의 구원 체험(23~32절)

5연에서는 해상 무역인들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는데, “큰물”(23절)은 바다며, 큰물에서 “영업하는 자들”(23절)은 해상 무역인들을 가리킨다. 바다의 파도를 일으키거나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였다. 광풍에 휩싸인 선원들의 모습은 술 취한 자가 비틀거리며, 두려움에 떨고, 정신이 나간 자를 방불케 한다. 이때 하나님의 구원은 광풍을 잠잠케 하고 파도를 잔잔케 하시는 일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이는 광풍과 파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 준다.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32절)하는 일은 공적으로 그분의 행하신 일을 증거하고 간증하는 것을 가리킨다.

6. 제6연: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를 노래함(33~42절)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만 아니라, 죄악에 대한 처벌을 동시에 묘사한다. 이 연에서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경우에는 동사의 시제를 현재로 번역한다. “샘”(33절)은 물이 솟구쳐 나오는 곳, 즉 물의 근원을 가리킨다. “마른 땅”(33절)은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중 반석에 물이 강같이 흐르도록 하신 지역을 말하는데, 이는 번창하던 사람들을 졸지에 거름더미에 앉히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을 암시한다. 열매 맺는 땅, 즉 “옥토”(34절)가 소금기 있는 땅(불모의 땅)으로 변화하는 것은 그곳 거민들의 죄악 때문이다.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인류는 계속 이런 심판을 받아 왔다. 제6연에서는 메시아 시대에 도래할 구원의 축복에 견줄만한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한다. ‘광야 사막에서 방황하며, 사람 사는 성읍에 이르는 길을 찾아 주지 못해,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모습이다. 구원받은 자들이 자신들이 거할 성을 건축하고, 그곳에 파종하며 재배하여 수확하고, 크게 번성한다. 이는 광야 방랑생활을 거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축복받는 삶을 반영한다. 그러나 언약 백성의 불순종은 ‘압제, 재앙, 슬픔’ 그리고 압제자 앞에 굴복당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인생의 성패와 흥망성쇠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다.

7. 결론적 진술(43절)

이상에 진술된 바에서 인생의 문제가 무엇이며,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 제시되었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를 깨닫고 축복된 삶을 살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섭리, 곧 악인에 대한 처벌과 의인의 구원사건을 주목하고, 언약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우치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전히 확신하고 그것을 경험적으로 알며 큰 감화를 받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의 목전에 있게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큰 유익이 된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적절히 살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 일들을 마음에 쌓아놓고 숙고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주의 깊게 살피는 일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하는 매우 중요한 단계다.

2. 소망을 가지라

의인들은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다루듯이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다루어 그들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을 보는 것, 멸시받던 자가 높아지고 불경건하고 교만한 자가 진토에까지 낮아지는 것을 보는 것은 큰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구원의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암담하게 보여도 우리들에게는 소망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이 다시 오시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는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이유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라. 수많은 이방인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한 민족이다. 430년 동안 애굽에 의해 어려움을 당했으며, 바벨론에 의해 어려움을 당했다. 또한 블레셋, 미디안, 암몬, 모압, 앗수르 등의 외세에 의해서도 수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러한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구원함을 받고 구속함을 받았다.

3절에서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 모으셨다’라고 했는데, 이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하나님의 구속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다는 것을 언급한다.

‘대적의 손에서 구속하셨다.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았다’는 말을 단순한 정치적인 자유나 해방만으로만 한정지을 필요는 없다. 이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죄의 종살이를 하던 우리들을 은혜와 사랑으로 죄 사함을 베풀어 주셔서 죄로부터 자유를 주셨다. 이는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시편 108편 주해와 적용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본문의 개요

시편 108편은 다른 두 시들의 후반부를 합쳐 놓은 시다. 1~5절은 시편 57:8~12에 해당되고, 6~13절은 시편 60:7~14에 해당된다. 1~3절에서 찬양하리라고 서원하는데, 그 이유는 4절에서 언급하듯이 그분의 언약 사랑 때문이다. 5절에서 다시 찬양을 드리고, 6절에서는 구원하여 주실 것을 간구한다. 이어 7~9절에서는 신탁이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10~12절에서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마지막으로 13절에서는 믿음의 자신감을 표출한다.

이렇게 두 시의 일부가 하나로 합쳐져서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는 서원과 그 이유, 그리고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하나님의 약속 메시지, 도우심을 호소하는 기도, 믿음의 자신감 표출 등의 조합이지만, 결국 본 시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공동체 탄식시로 간주할 수 있다.

본문 주해

1. 제1연(1~5절): 찬양하리라

시인이 찬양하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강조 표명하는데 심지어 새벽을 깨우겠으며, 새벽에 일어나 찬양함으로 새벽을 깨우겠다고 다짐한다. 그분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큰지 하늘보다 더 높고, 그분의 신실하심은 궁창에까지 미친다. 공간적으로 그분의 인자와 신실하심의 크기를 묘사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분의 위대하심과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나타나기를 노래한다. 이런 공간적 묘사와 비견되는 것이 시간적 묘사로, 그분의 인자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른다는 진술이 이어진다.

2. 제2연(6절): 구원하소서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고 있다. 물론 시인이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여 달라고 하는지는 논쟁의 대상이지만, 대체적으로 질병이나 원수에 대하여 승리하게 해달라는 점이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이와 같은 간구는 탄원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3. 제3연(7~9절): 하나님의 권능과 그의 약속

시인은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께 드린 간구를 다시 상기하는데, 이를 통하여 시인은 자신이 흔들림 없이 기도하도록 스스로를 다짐한다. 하나님은 세겜과 숙곳을 친히 정복하여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시겠다고 하셨다. 세겜과 숙곳은 각기 족장들의 발자취가 남은 곳으로, 세겜은 요셉의 유골이 안치되었으며, 시므온과 레위가 누이동생 디나의 강간을 위하여 무자비한 보복을 감행했던 곳으로 에브라임 영지로 할당되었다.

세겜 북쪽으로는 에발산이, 그리고 남쪽으로는 그리심산이 위치하며, 로마 황제가 그리심산 위에 섰던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파괴하고, 보다 더 북으로 올라간 지점에 ‘네아폴리스’라고 하는 새 도시를 건설했다.

숙곳은 야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고향으로 귀향할 때, 브누엘에서 이곳으로 이동하여 잠시 체류했던 곳으로, 후일에 갓 지파에 분배된다. “숙곳 골짜기”(7절)는 숙곳 지점의 요단강 분지를 지시하는 듯하다.

‘길르앗’과 ‘므낫세’를 언급하는 것은 요단 동편 지역도 이스라엘의 기업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듯 하며, 에브라임, 유다 등은 각기 이스라엘의 지리적 중심지와 정치적 중심지를 암시해 준다.

하나님은 더 나아가 모압, 에돔, 블레셋 등과 같은 주변국들까지 자신의 속국임을 분명히 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리하는 지상 대리자로서 이러한 주변국들을 지배해야 했다. 이는 신약적으로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인 주권과 통치를 예고한다.

4. 제4연(10~12절): 긍휼을 베푸소서

시인의 간구가 반복되는데, 제 4연에서는 영토의 회복을 위해 간구한다.

에돔은 에서의 후예들이 거하는 나라로, 이스라엘과는 관계가 좋지 않은 국가였다. 다시 이스라엘을 침범함으로 재기를 노리는 에돔을 겨냥하여 시인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통한 승리를 간구한다.

5. 제5연(13절): 믿음의 확신

전쟁에서의 필수 사항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직접 대적을 짓밟으실 것을 기대하며 전쟁에 임하여 용맹스럽게 행할 것이라는 결심을 표명한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토 문제로 이웃과 다툴 때 옛 하나님의 양속을 상기하며 주변을 점유하고자 노력한 정황을 고려한다면, 이를 단순히 영토에 관한 이야기로만 한정할 수 없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 나아갈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는데,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는 말씀을 반향하고 있다.

이 시편이 구약시대의 가나안 주변국들에 시야를 돌리고 있다면, 이는 우리 역시 온 세상에 눈길을 돌려야 하는 신학적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온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해야 할 사명을 가진 영적 군사다.

세상의 더럽고 추악한 문화와 영적 순결을 잃은 이 세대에 맞서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좆아 교회를 순결하게 하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라

기도할 때 하나님의 권능과 약속에 대한 믿음을 확신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그의 성소에서 그의 거룩하심을 두고서 맹세하신 말씀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과 행하시는 것이 별개가 아니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약속으로 인하여 위로를 얻어야 한다.

3. 오직 하나님만이 도움이다

우리는 피조물을 의지하고자 하는 모든 유혹을 떨쳐 버리고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을 감당해야 하지만,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뿐이다(빌 4:13). 이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해냈거나 어떤 것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과 관련해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는 이유가 된다.

시편 109편 주해와 적용

고통 속에서의 간구

본문의 개요

시편 109편과 110편은 관련성이 있는데, 그것은 시편 109편이 압제 당하는 이의 외침이고, 시편 110편이 곤고한 중에 처한 왕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두 시편은 유기적인 관계성을 가진다. ‘오른편에’(6절)라고 하는 표현은 시편 109편과 110편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고리다.

이 시에는 교차대구법(2~3, 14, 16절), 일석이조 수식어들(14, 20절), 은유들의 일치(2~3, 13~14절), 수미쌍관(1절과 30절, 7절과 31절, 21절과 26절, 22절과 30절, 26과 31절) 등의 기교를 사용함으로써 시의 통일성을 보여 준다.

이 시의 사고의 흐름을 보면 1절이 간구라고 할 때에, 2~5절은 그 이유를 묘사한다. 시인은 자신이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원수들이 자신을 고소하는 것에 대한 고통을 토로하고 있다. 6~20절에서 시인은 원수를 향해 저주하며, 21~29절에서 원수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한다. 마지막으로 30~31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며 찬양할 것을 서원한다.

본문 주해

1. 제1연(1~5절): 탄원의 이유

시인을 무고하게 비방하고 있는 원수들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개입을 간절하게 요청한다. 무고하게 기소 당했음을 보여 주는 시인의 모습은 하나님을 대표하여 재판하는 제사장 앞에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2. 제2연(6~19절): 탄원의 내용

탄원자는 원수를 향하여 저주를 쏟아 붓고 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우편에 서서 자신의 생명을 악한 자에게서 구해 주시길 확신한다. 그는 그들을 저주함과 동시에 그 후손들에게까지 그 저주가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다. 시인의 원수는 저주를 옷같이 입었고, 물같이 저주를 마셨으며, 그 저주가 그의 속속들이 뼈 속까지 침투하게 되었다. 원수의 띠가(19절) 불의한 재판관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때, 시인의 원수는 불의한 재판관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시인은 자신을 기소하는 자들과 그를 악담하는 자들에 대한 보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3. 제3연(21~25절): 탄원자의 고독

시인은 현재 자신이 어떤 고통 가운데 있는가를 묘사한다. 이는 자신의 무기력한 정황을 묘사함으로써 기도에 응답하셔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 시인의 현재 상황은 가난하고 마음이 상한 상태다. “석양 그림자”(23절)란 ‘길게 뻗친 그림자’란 의미로서, 석양 그림자가 사라짐같이 자신도 그렇게 사라지리라는 슬픔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그는 메뚜기처럼 내침을 받았다. 금식은 시인이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취한 조처였다. 시인은 무릎이 약해졌으며, 그의 몸은 기름기가 없이 수척해졌다.

4. 제4연(26~29): 탄원자의 구원에 대한 간구

시인은 다시 구원을 간구하는데, 구원을 간구할 수 있는 근거는 백성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에 대한 언약적 사랑,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다. 비록 원수는 시인을 저주한다고 하여도 하나님만큼은 시인을 축복해 주실 것이라 신뢰에 근거하여 그는 하나님께 자신이 현재에 처한 상황에서의 구원을 간구한다.

5. 제5연(30~31절): 탄원자의 찬양

이제 구원의 확신과 찬양하리라는 서원이 제시되고 있는데, 기도와 간구 이후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것을 확신한 시인의 확신이 넘치는 승리의 기도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재판하시는 자에게 변호하실 것을 확신한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근거 없는 비방에 담대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해하고자 하든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사람의 저주는 전혀 이루어질 수 없으며, 부당하게 저주하는 자들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기대할 수 없다. 반면에 의인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얻을 수 있다(28절). 이는 악인들의 계략은 반드시 좌절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세상 근심과 걱정으로 지치고 힘겨워 한다. 악한 세력들이 가져다주는 불안, 마음의 부담, 두려움 등이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께 우리의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근거 없는 비방에 치여 중심을 잃고 흔들리기보다, 오직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킴으로써 축복과 자유의 삶을 누려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고대하라

신앙의 가치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발견된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대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향하여 시선을 고정하는 것 같이 우리도 오직 그분의 임재의 놀라운 영광을 체험할 날을 고대해야 한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온전히 아시는 것 같이, 우리 또한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될 날을 고대해야 한다. 하나님은 영적인 감정을 고무시킬 목적으로 고안된 종교적 상징물들을 채집해 놓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삶을 보장하거나

인간성을 고취시키기 위한 종교적 성상이 절대 아니다. 영적인 상징은 더더욱 아니다. 그분은 인격의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체험해야 할 분이다.

시편 110편 주해와 적용

온 세상에 확장되는 메시아 왕권

본문의 개요

이 시가 생겨난 배경에 대해서는 예배 의식용으로 작시되었다는 의견과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을 들어 시의 배경을 이해하려는 입장, 또 이 시에서 언급된 왕이 다시 오실 메시아를 예언한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 시를 다시 오실 메시아라고 이해하고자 한다면 구약 자체의 문맥에서 그 본래의 의미를 해석해야 하는 숙제가 있지만, 이 시에서 언급하는 왕의 제사장직은 구약 내에서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신약의 증언을 의지하여 이 시를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 시의 구조는 간단하지 않으나, 하나님의 예언 말씀을 기준으로 1~3절, 그리고 4~7절로 나누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본문 주해

1. 제1연 (1~3절): 메시아의 통치

이 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메시아를 통해 성취될 것을 바라보는 메시아 예언시다. 시인은 다윗 자신으로 오실 메시아를 ‘내 주’라고 호칭하고 있다. 그렇지만 오실 메시아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여느 왕의 모습처럼 묘사되고 있다. 선지자들은 자기 당대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을 그렸던 것이다. 메시아의 오심의 성취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 예언시가 얼마나 정확하고 멋지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는가를 보며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약에서는 보이는 주변 이방국가들이 원수였다면,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는 보이지 않는 정사와 권세, 어둠의 세상 주관자 곧 악령들이 메시아 통치를 대적하는 세력이다.

“우편”(1절)은 통상적으로 영예롭고 우선적 지위를 의미한다. 여호와께서는 메시아 우편에 계시어 그를 도우신다. “발등상”(1절)의 경우 애굽에서나 앗수르에서도 왕의 비품으로 사용되었는데, 정복된 원수를 상징적으로 지칭한다. 한편 신약에서는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메시아 왕으로 등극하심으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시온으로부터 메시아 왕권이 온 세상에 확장되도록 일하신다. ‘당신의 권능의 홀’(2절)은 메시아 왕권의 상징이다. 왕권의 상징인 거룩한 옷을 입은 주의 백성에게는 새벽의 태가 낳은 듯한 젊음의 “이슬”(3절)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이슬은 비와 함께 생육의 원천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된다.

2. 제2연(4~7절): 메시아의 승전의 날

제1연의 사고가 보다 진전되고 있다. 1연에서 메시아의 통치와 전쟁의 날이 언급되었다면, 2연에서는 열왕을 쳐서 파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4절에서 언급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좆는 영원한 제사장직에 대한 언급은 이 시가 메시아 예언시임을 보여 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메시아의 제사장 직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흠 없는 제물로 바치신 십자가 사건에서 절정에 이르렀고, 그 이후로 메시아 왕으로 등극하시어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심으로 그 직무는 수행되고 있다(롬 8:34). 따라서 하나님이 왕이시라면, 그에게 속한 우리는 ‘왕’이며 그분이 대제사장이시라면 우리 역시 제사장인 것이다.

메시아는 분명 그의 나라에 대한 모든 반대를 무력화시키실 것이고, 끈질기게 반역하는 모든 자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세상의 군왕들과 고위 관원들이 그들의 목적을 관철시키는 데 익숙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메시아를 대적하여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고, 도리어 그 시도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는 메시아에 관한 최초의 약속, 즉 그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깨어 있어라

주 예수께서는 분명히 그의 나라에 대한 모든 반대를 무력화시키실 것이고, 반역하는 모든 자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에게 가까이 계셔서 그들을 도와 즉시 힘을 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와 그들의 원수들을 치기 위하여 나타나실 것이다. 그의 노하시는 날, 즉 원수들의 죄의 분량이 가득 차서 그들이 멸망할 날이 무르익어 주께서 진노하시기로 정해진 때, 주의 인내의 날이 끝이 나서 진노의 날이 임할 것이다. 현재는 도저히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더라도, 그리스도께서 특정한 원수들을 멸망시키실 때가 정해져 있고, 그때가 되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의 진노의 큰 날은 종말의 때 있을 것이다(계 6:17).

2. 승리를 확신하라

승리는 아주 높은 자들에게까지 미치게 될 것이다. 주께서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며 아무리 큰 자들이라고 해도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은 그 앞에서 엎드러지게 될 것이다. 이 승리는 아주 멀리까지 미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모든 원수들의 철저하고도 완전한 파멸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는 그들을 철저하게 쳐부수어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실 것이다. 이는 메시아에 관한 최초의 약속, 즉 그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창 3:15)과도 연관성을 가진다.

3. 낮아짐을 배우라

메시아는 이기신 자로서, 이는 그가 ‘높아지신 것’(exaltation)이라기보다는 그가 승리를 대단히 ‘기뻐하신 것’(exultation)을 의미한다(골 2:15),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신 것은 그가 낮아지신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다. 우리 역시 그와 함께 고난을 당하면 또한 그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될 것이다.

시편 111편 주해와 적용

거룩하고 지존하신 이름

본문의 개요

시편 111편은 112편, 113편과 함께 ‘할렐루야’ 삼부작을 이룬다. 시편 111편이 정직한 자들 회 가운데서 여호와의 영광, 권능, 인자하심을 송축한다면, 시편 112편은 거기서 흘러나오는 영광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 정직한 자들의 행실과 성품과 축복을 노래한다.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두 시편은 매우 유사하다. 둘 다 알파벳 시며, 이전 시들로부터 차용한 부분들로 구성되었다.

시편 111편과 112편에서 각기 1절은 시의 주제를 제시한다면, 그 다음 구절들은 주제를 세세하게 전개시킨다.

시편 113편도 ‘할렐루야’로 시작하며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외친다.

이 시의 현저한 특징은 알파벳 시라는 점이다. 알파벳은 한 절씩 배치되지 않고, 한 절에 두 개씩 배치되고, 9~10절에만 세 개씩 배치되어 모두 22개를 갖추었다.

구조를 살펴보면, 1절에서 찬양하리라는 결심을 표명한다면, 2~10절에서는 그 찬양의 선포 곧 그 찬양의 내용이 제시된다. 10절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지혜 문헌적 사고를 표명하고 있다.

2~10절 부분을 사고상으로 다시 구분하자면, 2~7상절은 여호와의 구원행위들을 노래하고, 7하~10절은 여호와의 언약 규례들을 노래한다.

본문 주해

1. 제1연(1절): 찬양 결심

여기에서 발표된 시인의 의도, 곧 그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내용이 2절 이하에서 제시되고 있다.

2. 제2연(2~7상절): 여호와의 ‘행사’를 찬양하다

언약 백성에게 출애굽의 구속을 위한 기사들이 있었다면, 새 언약의 백성에게는 십자가, 부활, 승천, 등극의 큰일들이 있다. 언약백성이 출애굽의 기사를 늘 선포하고 노래했다면, 신약백성도 마땅히 십자가 구원을 늘 노래하고 선포할 것이다.

“여호와의 행사”(2절)란 그분이 행하신 일들이며 “그의 의”(3절)란 그분의 구원하시는 의로운 일을 지시한다. 그분이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하신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이스라엘이 압제 하에 신음할 때,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기억하심에서나 광야에서 거듭 반역하고 불평할 때도 오래 참으심으로 저들을 용납하심으로써 나타났다.

“양식”(5절)은 원래 맹수 혹은 육식조의 먹이를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공급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과 언약 맺은 백성을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언약 백성은 그분을 배반할지라도 그분은 자신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행사의 능력”(6절)이란 그분의 능하신 행사들이다. 즉 구약백성들이 노래할 하나님의 행사는 출애굽에서 나타난 기사들만 아니라, 그 이후 광야 방랑시에 행하신 기이한 일들이나 가나안 정복에서 행하신 기사들까지 총망라한다.

그의 “손”(7절)은 그분이 일을 행하시는 수단을 표현하는 의인법이다. 이런 고백이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고, 불평과 야속한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미성숙한 모습이거나 병든 모습일 것이다.

참 신앙이란 그분의 섭리와 인도에 순응하여 마음에 감사가 우러나오는 상태를 가리킨다.

3. 제3연(7하~10절): 여호와의 언약을 찬양하다

구약 성도들의 삶의 규범은 시내산언약과 그 갱신인 모압언약이었다. “법도”(7절)는 언약조항들을 지시하는데, 언약, 규례, 율법, 교훈,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증거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이스라엘에게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엄위’하신데, “이름”(9절)은 그분 자신을 가리킴과 동시에 그분의 ‘속성’을 가리킨다. 애굽에서, 홍해에서, 시내산에서, 광야에서, 가나안에서 행하신 크신 일들로 인하여 그분의 속성은 거룩하시고, 위엄 있으시다는 사실이 온 세상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난다.

“그 계명을 지키는 자”(10절)에서 ‘그것들’은 ‘그것(여호와를 경외함)을 행하는 자에게 좋은 통찰력이 있다’로 보는 것이 옳은 해석일 듯하다.

즉 시인이 노래하는 목적은 정직한 자들의 모인 회중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과 함께 그분이 주신 언약 조항들을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베푸신 일 속에서 그의 전능하심을 보여 주는 증거들을 무수히 행하셨고, 그에게 불가능한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 주셨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들은 둘 다 견고하여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장차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실 큰일들이 확실하게 이루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결코 취소되거나 무효화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 일들을 무효화시키지 않으실 것이고, 사람들과 마귀들은 그 일들을 무효화시킬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진실과 정의로 행하시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언행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리석고 거짓되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거나 행하는 모든 일에 정함이 없지만,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와 진리 속에서 말씀하시고 행하시기 때문에 취소나 폐기는 영원히 배제된다.

2.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이름을 경외하여야 하고, 거룩한 경외심으로 그 이름을 생각하고 말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의 본분임과 동시에 그의 말씀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도리에 맞고 합당하며 우리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말하고 행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지혜의 머리, 즉 지혜의 시작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지혜로워지기 시작한다. 모든 참된 지혜는 참된 신앙에서 생겨나고, 참된 신앙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모두 형통할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향하여 진군하는 여호수아에게도 율법을 따라 행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고 약속하셨다(수 1:8).

진정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복으로 가는 너무도 좋은 길을 인간에게 주신 것에 대하여 영원히 하나님을 찬송하여야 할 것이다.

시편 112편 주해와 적용

믿음으로 말미암은 견고한 믿음

본문의 개요

시편 112편은 시편 111편과 같이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알파벳 시다. 내용적으로 볼 때 시편 112편은 111편을 보충한다. 시편 111편이 하나님의 행하신 위대한 일들과 언약을 노래한다면, 시편 112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인격과 일들의 위대함을 노래한다.

이 시는 지혜의 내용을 담고 있다. 야웨를 경외함, 율법을 존중함, 의인과 악인의 대조, 보응의 불가피성과 일상 삶에서의 자세에 대한 조언 등과 같은 주제가 지혜시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외형적으로 부각되는 이 시의 특징은 시편 111편과 동일하게 알파벳 시로써, 한 절이 두 알파벳 글자를 포함하고, 마지막 9, 10절에서는 각기 세 알파벳 글자를 포함한다. 그리고 이 시는 1, 2, 3, 5, 6, 7, 8, 10절에서 병행구조를 보이고 있다.

내용상으로는 1~4절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임하고, 그런 자의 성품은 의와 은혜, 그리고 긍휼로 특징지어진다.

5~9절에서 그의 성품이 실제 현장에서 드러나며, 또한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한다. 그의 성품은 견고히 세워졌으며, 따라서 그는 축복받는 자다. 그 결과 이 시의 결론부인 10절에서 여호와를 경외치 않는 자들은 완전히 좌절하고 넘어질 것이라 노래한다.

본문 주해

1. 제1연(1~4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임하는 축복

“후손”과 “후대”(2절)가 서로 병행되는 짝으로서, 이들이 복이 있으리라는 말과 같다. “의”(3절) 개념은 공의 개념으로서, 이 용어는 때로는 ‘구원’ ‘평안’ ‘인자’와 병행어로 나타난다. “흑암”(4절)은 죄악과 실패와 저주를 의미하며, 흑암 가운데 일어나는 빛은 하나님 자신이시기에, 이 빛은 구원과 소망과 생명의 상징이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그 신적 성품을 상실했다. 그러나 구원을 통해 이 속성은 회복되는데, 따라서 우리가 신적 성품에 참여한다고 할 때, 이는 이웃을 향한 우리의 은혜로운 자세에서 나타나야 한다. 그런 성품은 오랜 연단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응할 때 형성될 것이다. 고난 없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는 불가하다.

2. 제2연(5~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의 성품과 삶

복된 자의 성품의 경우, 천부적으로 타고 나는 자는 매우 드물다. 구원 받은 이후에 성화의 긴 여정을 통해 다듬어지고 부서질 때 진주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요동하다’(6절)란 산들이 흔들리듯 요동치는 모습이지만, 위태위태한 불안정한 의미가 담겨 있다. 6하절에서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라’고 하는데, 자기 생명을 던져 타인을 구한 사람들은 세인의 기억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흉한 소식”(7절)은 기쁜 소식, 아름다운 소식과 대조된다. 경건한 자라고 해서 고난이 없지 않다. 많은 고난이 있지만, 그것들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이기며 나가는 길 뿐이다. 성도의 대적은 때로 그를 두렵게 하거나 실제로 그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하지만, 성도는 그런 것에 굴할 수 없다.

“흩다”(9절)는 ‘뿌리다’란 말이지만, ‘아낌없이 주다’란 의미로 보아야 한다. 정직한 자는 빈궁한 자에게 자기 재물을 뿌리듯 아낌없이 베푼다. 그것이 ‘의’다. “그의 뿔”(9절)이란 권세나 힘을 지시한다.

3. 제3연(10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의 종국

베풀기 좋아하는 삶의 모습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의 모습이다.

그들이 의인이라면, 이에 대조되는 ‘악인’은 의인의 형통을 보고 화가 나서 이를 간다고 했다. 하지만 악인은 낙담하고 그들의 바람은 허사가 된다.

‘악인이 소멸된다’(10절)는 말은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모두 불행하다거나 아니면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신자들이 오히려 세상적으로는 형통하고 고난 없이 평안한 일생을 누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의 영원한 운명이 지옥임을 고려한다면 그 모든 현세적 부귀와 영화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 구절은 악인의 현세적 불행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지속적으로 베풀고 선을 쌓는 자의 형통에 악인의 시기와 그런 자들의 궁극적 몰락을 지적하고 있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견고하리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는 것은 선한 자의 복이다.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세력들은 우리를 흔들어 놓으려고 애쓰지만, 비록 잠시 흔들린다고 하여도 우리는 곧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견고히 서 있게 될 것이다. 의인의 평판을 더럽히고 그에게 수치와 비방을 뒤집어씌우고자 온갖 짓을 하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의인의 결백은 밝혀지고 그의 이름은 그가 죽은 후에도 지속될 것이다. 사실이 아닌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크게 당황하기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이야말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굳게 정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의 닻을 내리고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여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진리 외에는 그 어디에서도 견고히 설 수 없고 만족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만 견고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견고한 마음을 지니게 된 자들은 그들이 목적을 이룰 때까지 인내로 기다린다.

반면에 악인은 의인이 형통하고 존귀하게 되는 것을 보고 한탄하게 될 것이다. 성도들이 잘 되면 악인들은 그것을 시기하게 되고, 시기는 그들의 뼈를 썩게 만든다. 악인들의 욕망은 전적으로 세상과 육체에 대한 것들로써, 이런 것들이 사라질 때, 그들의 기쁨도 사라지고, 그런 것들에 대한 기대도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한 낭패를 당하게 된다.

2. 여호와를 경외하는 가정이 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말씀 중심의 가정이 될 때 진정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 이러한 가정은 후손이 강성해지는 축복을 받게 된다. 이러한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당대뿐만 아니라 후손대대로 미치게 된다. 설령 당대에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일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의 풍성하신 자비에 따라 그들에게 가장 유익한 방법으로 복 주심을 신뢰하라. 악한 자들은 세상에서 헛된 권세를 누리는 것을 최고의 복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비록 빈궁하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며 훗날 영광을 나타낼 만한 이들로 사용 받을 것이다.

시편 113편 주해와 적용

인간을 위해 낮아지신 주님

본문의 개요

초막절, 하누카(=수전절), 유월절의 첫 날, 오순절 등의 절기에 회당에서 시편 113~118편이 모두 낭송되었다고 전해진다.

시편 113편은 시편 112편과 여러 면에서 연결된다. 시편 112편이나 113편을 보면 모두 경건한 자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풍성하게 공급하시며, 저들을 건지시며 영예를 안겨 주신다. 여호와는 자기를 신뢰하고, 경외하는 자들만 보호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후손들까지 축복하신다.

본 시편의 1~3절은 찬양의 권고, 4~9절은 찬양의 내용이다.

본문 주해

1. 제1연(1~3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호와의 종”(1절)은 예배하는 모든 경건한 자들을 지칭한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2절)란 표현과 “해 돋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라”고 하는 말은 시간적으로 영원히 찬양해야 함을 의미한다.

2. 제2연(4~6절): 높이 계신 하나님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보다 위대하시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다. 그리고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그분은 홀로 하나님이시며,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분이다. 높은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은 그가 온 우주의 통치자이심을 의미한다. 높이 계신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고 인간 세계를 살피고 섭리하신다.

3. 제3연(7~9절):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높이 들린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인생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거름 무더기”(7절)란 매우 천박하고 비천한 자리, 수치스러운 치욕을 지시하는 표상이다. 이전에 반역자의 집은 ‘거름더미’를 만들어 버렸다. 바알 신전을 헐어서 거름 더미가 되게 한 것 같은 방식이다.

욥은 몰락하고 병들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다. 고대에 무서운 병에 걸린 자는 아무도 반기지 않고, 결국 거름더미에 누워 지나는 자들에게 구걸을 하거나 저녁이 되면 낮 동안 따뜻하게 데워진 그 거름 가운데 자신을 숨기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비천한 자리에 처한 자라도 매우 존귀한 자리로 들어 올리신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이 같은 비천한 처지에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시고, 열방의 일원으로 존귀한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분은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함께 앉게 하시며”(8절)는 왕의 보좌는 아닐지라도 그에 버금가는 존귀한 자리에 앉게 하신다는 것이다.

전에 우리는 죄와 허물 가운데 행하며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섬기던 자들이었지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입었고, 그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고 일으키어 하늘 보좌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히셨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 같은 제사장들로 은혜 가운데서 왕 노릇 하는 것이다. 방백들이 따로 있지 않고 우리 성도의 모습이 그렇게 존귀하다.

하나님은 낮고 천한 자, 약한 자, 무식한 자를 들어 세상의 배운 자, 존귀한 자, 가진 자,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없는 자들과 약한 자들에게 믿음의 부요함을 주시어 궁극적으로 존귀하게 만드신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신다’는 표상은 한 가정의 주부 곧 한 남편의 아내이긴 해도, 자녀가 없어 늘 가정에서의 위치가 불안하던 여인이 자녀를 낳음으로 지위가 확고해지는 모습이다.

국가적으로 말하자면, 무자하던 왕비가 늘 자리가 흔들리며 좌불안석이다가 왕자를 하나 잉태함으로 지위가 확고해지는 그런 표상이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하나님을 찬양하라

우리는 믿음의 눈을 들어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아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 세상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미치고 있는지를 보고 그분을 찬송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 거하시면서도 스스로 낮추시고 천지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기에 자신의 존귀함의 원천으로서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고 자신의 은혜의 원천으로서 스스로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베푸신 선하심은 이 세상의 많은 것들 속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을 찬양하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기에 이는 성도의 적극적인 생활의 발로이기도 하다. 본문에서 언급하듯이 여호와의 종들은 찬양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2:9에서도 언급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영원토록 모든 세대가 해야 할 영광스러운 특권이다.

2.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셨다(7~8절). 하나님은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실 때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가장 비천한 것을 택하여 그 일에 사용하시며 저희들 스스로도 가장 비천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까지 이르게 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때때로 빈곤과 수치의 무거운 짐 아래서 오랫동안 신음해 온 사람의 뛰어난 경건과 인내에 보응하신다. 우리는 하늘의 지혜를 얻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의 응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이와 같은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높은 자가 낮아지게도 하시며 낮은 자가 높아지게도 하신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게도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름 무더기에서 높이 들어 방백들과 함께 세우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이나 조건이 어려워도 자리에 있다고 해서 조금도 낙심하거나 자포자기할 필요가 없다.

근심과 걱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주님께 나아가라.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만날 때 변하여 새 사람 되고 복음을 전하는 가치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법이다. 주님께는 가치 없는 존재란 절대 없다. 그분의 손에 들리기만 하면 마른 막대기라도 가치 있게 사용하신다. 사실 우리는 모두 무가치한 존재들이지만 능력의 하나님의 손에 잡힐 때, 가치 있게 사용 받을 수 있다. 주님의 손길은 소망 없는 우리에게 소망을 안겨 준다.

시편 114편 주해와 적용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본문의 개요

앞에서 언급된 시가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했다면, 여기에서는 출애굽의 신현 은총을 노래한다.

앞의 시편이 존귀하게 만들어 주신 은총을 노래한다면, 여기에서는 그 가정들의 집합체인 이스라엘 언약 백성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노래하고 있다.

다른 출애굽을 노래하는 시들과 달리 이 시는 매우 경쾌하게 출애굽 당시의 신현으로 나타난 자연계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다.

우선 본 시는 시편 113편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사상적으로는 두 시가 공통으로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곤경에서 건지신다고 한다.

단어 면에서는 두 시 모두 출애굽 당대에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강을 가르신 사건(3, 5절), 시내산에 여호와의 강림(4, 6, 7절), 광야에서의 기적(8절)을 언급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초점은 출애굽 시의 신현을 동반한 자연계의 격변에 두고 있다. 바다, 요단강, 산들, 땅, 반석 등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에게 이런 자연력들은 치명적 장애물이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들을 기적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 이 시는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불가능은 하나님 앞에서 기적의 재료가 된다.

사고의 흐름을 볼 때, 1~2절은 이 시의 시간적 틀을 출애굽 시대로 고정시킨다. 3~4절은 홍해나 요단강, 그리고 산들과 언덕들이 그때에 하나님을 두려워했다고 노래한다. 5~6절은 앞서 언급된 자연력이 어찌하여 그렇게 무서워했는지 수사적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7~8절은 온 땅이 권능의 하나님 앞에서 떨기를 명함으로 본 시편을 마무리 짓고 있다.

본문 주해

“이스라엘”/“야곱의 집”, “애굽”/“방언 다른 민족”(1절)이 단어 짝을 이루고 있다. 가나안 땅은 “성소”(출 15:17)라고 불린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성별하셔서 자기 백성의 거처로 삼으시고, 그 중에서 예루살렘을 성별하여 그곳에 자신의 성소를 세우셨다. 넒은 의미에서 가나안 전체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소였다(레 26:12; 신 23:15).

그의 “영토”(2절)라는 말은 그가 통치하는 ‘영역’을 말한다. 그렇다고 열방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특별하게 이스라엘을 통치하시고, 열방은 일반 은총으로 관여하셨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아마도 동의어로 이스라엘 전체를 지시하고 있는 듯하다. “성소”(코데쉬, 2절)로 번역된 말은 ‘거룩함’을 기본적으로 의미하고, 그것이 구체화되어 거룩한 곳, 구분된 곳, 곧 성소란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추상적인 말의 구체화’의 한 예가 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기 전에 벌써 유다와 이스라엘이 대비되어 함께 나타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다.

“바다는 이를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며”(3절)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바다가 놀라 도망친 양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출애굽 기사에 의하면, 하나님은 큰 동풍을 밤새도록 불게 하셔서 바닷물로 물러가 홍해물이 갈라지도록 하셨다. 반면 요단강을 도하할 때는 단지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변방에 일어나 쌓이고”(수 3:16)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출 19:18)라고 하였는데, “산들은 수양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 같이 뛰었도다”(4절)라는 말은 지진과 같은 자연의 대 격변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며, 이는 신현에 동반되는 현상이다.

“떨다”(7절)는 말은 임산부가 진통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시인은 땅에게 시내산 강림 시에 일어난 현상을 여기에서 재현하라고 명령한다. 3~6절에서 시인은 자연계의 대 격변의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었는데 이제 무대의 막을 열어야곱의 하나님, 이 웅대한 연극의 주인공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떨라’고 외친다.

어쩌면 시인은 자기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땅’으로 바꾸어 그 땅이 ‘하나님 앞에서 떨며 굴복할지어다!’라고 명령하는지 모른다.

“저가 반석을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8절)는 말은 광야 때 일어난 사건을 지시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여 구원을 행하시는 분이다. 이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노래한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하나님을 경험하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고, 하나님은 그들의 율법 수여자와 재판장이 되셨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원수들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그들 앞에서 홍해를 갈라지게 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그들을 존귀하게 하시고 원수들을 두렵고 당혹스럽게 하시기 위하여 요단강을 갈라지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선두에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바다와 요단강은 그들에게 길을 내주어야 했다.

큰 산들과 작은 산들은 하나님 앞에서 단지 숫양들이나 어린 양들과 같다.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떠는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도 꿈쩍도 하지 않는 인생들의 우둔함과 완고함을 부끄럽게 만들 뿐이다.

반석을 쳐서 물이 되게 하신 하나님 앞에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이 두려워 떠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거룩하고 위대한 이 일들을 보고 듣고 체험하고 선포하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에게도 나타나야 할 것이다.

2. 세상을 변화시키라

성도들은 애굽과 같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의 백성이 되었다. 이제 남은 일이 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내 자신이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성전이 될 뿐 아니라, 가정·학교·일터가 모두 복음으로 변하는 것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누룩이 퍼지듯, 겨자씨가 자라듯 복음은 온 사회에 깊숙이 퍼져 그 가치관·사회관·인생관·종말관·도덕관 등을 변화시킬 것이다.

시편 115편 주해와 적용

도움이요 방패이신 여호와

본문의 개요

시편 115편은 114편과 용어적인 면에서도 연결이 되며, 시의 말미에 ‘할렐루야’가 붙은 시들(115~117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시편 115편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자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시켜 준다면, 시편 116편은 여호와를 찬양해야 할 이유를 지닌 개인에 초점을 맞추면서 찬양의 주제를 지속한다.

끝으로 시편 117편은 열방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노래한다. 이 세 개의 시편은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함을 노래한다.

원문을 보면 이 시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동일한 단어들이 반복된다.

예컨대 3, 17절에서는 ‘모두’, 1, 17절에서는 부정하는 말 ‘않다’, ‘행하다’(3, 4, 15절), ‘사람’(4, 16절), ‘하늘’(3, 15~16절) 등이다.

이는 1~3절과 14~18절의 사고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본문 주해

1. 제1연(1~3절): 절대 주권자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실패와 패배를 허락하지 말아달라는 간구다. ‘인자와 진실하심’은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그분의 속성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2절의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우문으로서, 불신자들의 무지와 달리 시인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과 ‘그는 자기가 원하시는 바’(3절)를 무엇이나 행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고 있다.

여기에서 제시된 ‘우리 하나님’(3절)은 이제 4절 이하에서 조소당하는 우상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2. 제2연(4~8절): 무능한 우상을 조소함

우상의 크기나 모양, 만드는 방법은 다양했다. 그 중 가장 흔했던 것이 사람 실물 크기의 우상인데, 그것은 나무를 깎아 만들어 그 위에 금이나 은을 입히는 것이었다. 우상은 특히 종교축제 때에 사람들이 늘어선 가운데 메고 행렬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제사장들은 우상을 씻기고 돌보는데 지대한 관심을 쏟아야 했다.?

우상을 봉헌할 때는 찬양시를 지어 낭송하고 주요 예배가 있을 때도 이 우상들에게 찬양을 올렸다. 고대 근동에서는 신들이 짐승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나, 나중에는 인간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의 모양이나 신의 모양이 구분되지 않고 단지 씌워진 면류관의 모양이나 주름 잡힌 의복의 모양에서 구분이 되었을 뿐이다. 이는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 지방 모두 동일하였다.

한편 가나안 족속이 주신으로 섬겼던 바알은 폭풍신으로 황소모양으로 만들거나 황소의 등에 탄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우상의 가치는 그 안에 신의 생명이 들어 있다고 믿는 것에서 출발했다.

“우상”(4절)은 ‘접다’, ‘엮다,’ ‘모양을 만들다’란 말과 연관된다. ‘우상’은 은금을 가지고 사람이 만든 수공물이다. 이방인들은 고대에나 현대에나 우상 안에 신의 생명이 있다고 믿는다.

고대 근동 이방사람들은 우상을 만들 때 그 우상의 입을 벌리는 의식을 통해 사람의 수공품을 살아있는 신의 생명이 역사하는 신으로 변신시키는 과정을 거쳤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한다면, 목구멍으로 ‘소리도 발하지’(7절) 못한다.

반면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거니시는 것으로 묘사되거나(창 3:8) 이스라엘 가운데 두루 행하신다고 할 때 이는 그분이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신다는 의미다.

우상을 제조하는 자(8절), 그 우상을 신뢰하는 자는 모두 그 우상과 같이 무기력하게 된다.

3. 제3연(9~11절): 여호와를 의지하라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신뢰할 때 강성하였다. 시인은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10절)을 향하여 오직 여호와만 신뢰할 것을 권고하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경건한 자들이다(11절).

여기에서 ‘경외하다’로 번역한 ‘야례’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신현 현상을 체험할 때 느낀 감정을 가리킨다. 그분의 강림하시는 신현 현상은 두려움을 자아내는 자연의 대격변을 동반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낀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분이 행하시는 일들이 ‘두려움을 자아내는’ 그런 이적과 기사였다.

4. 제4연(12~15절): 너희는 복받는 자로다

이제 제사장 혹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한다. ‘생각하다’(12절)라는 동사의 기본적 의미는 ‘언급하다’로서, ‘기억’, 혹은 ‘상기’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단순한 기억이나 생각이라기보다는 세심한 돌보심까지 염두에 두는 행동을 지시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그 사회적 지위나 신분의 차이에 상관이 없이 모두 복을 주시리라. ‘번창케 하다’(14절)는 ‘더하다’, ‘증가시키다’, ‘다시 하다’ 등을 의미한다.

5. 제5연(16~18절): 평생에 찬양하리이다

찬양의 서원이 드려진다. 제사장의 권면과 축복을 받은 경건한 무리들의 반응이다. ‘인생’(16절)은 ‘인자’(人子)의 복수형으로 ‘인생들’ 곧 인류를 의미한다. “적막한 데”(17절)는 바로 ‘음부’를 지시한다.

죽은 자, 음부에 내려가는 자와 달리 생존한 우리 성도는 생존하는 날 동안 늘 하나님을 송축하여야 할 것이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하나님은 방패시다

시편 신앙인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곤경으로 인해서 이방인들이 우리를 조롱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말 것을 권면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직 여호와를 의지해야 하며, 각자의 사적인 일들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도록 맡겨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도움과 방패가 되셔서 모든 일을 그들에게 가장 유익한 방향으로 행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도움과 방패가 되어 주신 하나님은 미래에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하나님은 앞으로도 우리를 잊지 않으실 것이다. 이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고, 그의 능력과 선하심도 동일하며, 그의 약속은 깨뜨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소망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2. 하나님을 신뢰하라

시편 신앙인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크게 격려하면서, 왜 우리가 온전히 만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와 궁핍, 무거운 짐들을 생각하셨고, 그분을 향한 우리의 기도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약속을 생각하셨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잊을지언정,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실망시키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기쁜 마음으로 의지해야 함을 명심하여야 한다.

3. 하나님을 찬송하라

우리와 우리 뒤에 올 자들은 이제부터 영원까지 종말의 때까지 여호와를 송축할 것이다.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열심히 여호와를 찬송하여야 한다. 살아 있는 동안 시간을 아끼고 잘 활용해서 밤이 오기 전 하나님을 찬송하여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밤이 오면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선한 일을 행하실 것이기에, 우리는 여호와를 송축하고, 그를 칭송할 것이다.

시편 116편 주해와 적용

내 영혼을 건지소서

본문의 개요

시편 116편은 115편과 여러 면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115편이 세 개의 주제를 가지고 노래하고 있다면, 시편 116편은 그 주제를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예컨대, 시편 115편이 ①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에 비길 수 없이 위대하시다,?②하나님은 곤경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에 능하시니 의지할만하다,?③하나님은 위대하심으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등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면 시편 116편은 사망의 위험에서 건져주심을 찬양하는 개인 감사시로, 기도 ·탄식·확신·서원 등의 요소들이 함께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가 건짐 받은 위험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다. 아마 중병이었을지도 모른다(3절).

이 시의 구조는 두 개의 스탄자(Stanza)로 나누고(스탄자Ⅰ: 1~9절 / 스탄자Ⅱ: 10~19절), 각 스탄자를 각기 두 개의 연으로 구분한다. ‘여호와’란 칭호가 스탄자Ⅰ에 일곱 번, 스탄자Ⅱ에서 여덟 번 나오고, ‘엘로힘’(하나님)이란 칭호가 5절에서 나타나므로, 결국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은(여호와, 엘로힘) 스탄자Ⅰ,Ⅱ에 각기 여덟 번씩 나타난 셈이다.

본문 주해

1. 스탄자Ⅰ의 1연(1~4절): 사망의 위협에서 부르짖다

시인은 현재 사망의 위협에서 부르짖고 있다. “간구”(1절)는 ‘은총’을 간청한다는 뉘앙스로서, 공포에 질려 은총을 간청하는 기도로 통상적 기도보다 다급한 외침인지 모른다. ‘내가 외칠 때마다, 그는 자기 귀를 내게 기울이시기 때문이다’(2절). ‘나의 날들에’라는 표현은 ‘때마다’라기보다 ‘나의 평생에’를 의미한다. ‘기도하리라’로 번역된 말은 ‘내가 외치리라’ 혹은 ‘내가 외쳐 부르리라’ 다음에 ‘야웨의 이름을’이 생략되었다.

“사망의 줄”(3절)은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표현한 경우다. 마치 ‘사망’이 줄들로 사람을 꽁꽁 묶어 꼼짝 못하게 하는 듯 묘사한다. “슬픔”(3절)은 자식을 잃은 때의 ‘극도의 슬픔’을 묘사한다. 이 문맥에서는 수(壽)를 다 누리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고통스런 슬픔이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4절)는 몇 가지 뉘앙스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는 야웨의 이름을 부르다. 이것은 곧 예배의 맥락에서 그분을 부르는 것이다. 둘째로는 야웨의 이름을 선포하다는 뜻이다.

“주께 구하오니”(4절)는 간청하는 감탄사 ‘제발!’, ‘부디’ 정도의 말이다.

2. 스탄자Ⅰ의 2연(5~9절): 하나님의 성품과 구원 역사, 시인의 결심

시인은 부르짖는 가운데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고 힘을 얻는다. “내가 낮게 될 때에”(6절)란 말은 ‘미미하게 되다,’ ‘미천하게 되다.’ ‘가난하게 되다’라는 의미다. 시인은 경제적 궁핍함의 처지에 떨어졌는지, 아니면 노예로 사로잡혔는지, 아니면 질병으로 아주 쇠약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관직에서 강등을 당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런 때에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구원하셨다.’

“평안함”(7절)은 안식처를 의미한다. 시인이 사선을 넘나들 때, 그 사망의 고통과 슬픔에서 구원 받은 시인은 이전의 그 평안함과 안식의 상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영혼, 눈, 발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각기 사망에서, 눈물에서, 넘어짐에서 건지셨다고 노래한다. ‘건지다’(8절)는 기본적으로 ‘옮기다’ 혹은 ‘제거하다’란 의미로, 위험한 자리에서 ‘옮기다’, ‘구하다’라는 의미다.

“내가 생존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9절)는 말은 죽음에서 벗어나 건강을 회복한 자의 감사고백이자, 결심인 듯하다. 곧 살게 되었으니 하나님 앞에서 행하겠다는 것이다. 원문에 ‘땅들’ 복수형이 사용된 것은 사망에서 건짐을 받은 후에 느끼는 그 평안함 가운데서 거칠 것이 없이 활동할 ‘넓은 영역’을 암시하는 듯하다.

3. 스탄자Ⅱ의 1연(10~14절): 위기상황을 회상하며 보답을 결심

시인은 위기상황에서 인간이 의지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생생하게 체험하였다. 10절의 번역은 난해한데, “내가 믿는 고로 ‘내가 크게 곤란을 당한다’(10절)라고 말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보다, ‘듣다’, ‘말하다’, ‘믿다’, ‘기억하다’, ‘망각하다’, ‘후회하다’ 등을 의미하는 동사의 다음에 접속사 ‘키’가 위치하여 종속절을 유도하기도 한다는 용례에 의한 것이다.

통상적으로 ‘키’ 이하 종속절은 동사의 목적을 표현하겠지만, 앞서 언급한 동사 다음에 나오는 ‘키’가 유도하는 종속절은 그 동사의 동작 결과를 지시한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인 번역은 바울 사도의 인용에 의존한다. 사도 바울은 곤경에 대하여는 생략하고 단지 ‘믿으므로(잠잠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한다’라는 요지로 시편을 사용한 것 같다. 곤고한 중에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임을 절감하였다.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어떻게 갚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자만이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다(12절). “구원의 잔”(13절)이라 함은 시인이 체험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총을 감사하며, 높이 쳐들고 마시는 잔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는 말은 공적으로 여호와의 성호를 찬미하거나 기도로 부르는 것을 뜻한다.

4. 스탄자Ⅱ의 2연(15~19절): 시인의 서원

‘성도의 죽음이 귀하다’(15절)는 사고는 ‘사망’을 긍정적인 요소로 간주하지 않는 구약의 사고를 고려해 볼 때, 전연 합당치 아니하다. ‘귀하다’(15절)는 말도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15절에서 ‘죽음’으로 이해되는 단어를 새롭게 이해하고자 한다. 이 말은 구약에서 한 번만 언급되며, 아람어로 ‘믿음’을 의미하는 말로가정한다. 즉, 하나님은 성도의 믿음을 귀하게 보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을 묶었던 “결박”(16절)은 사망의 줄이다. 단순히 회중 앞에서 서원을 갚으리라한다면, 여기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성소에서 ‘감사제사’(17절)를 드리며, 공 예배 때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며 기도로 부르리라 서원한다. “여호와의 전정에서”(19절)란 ‘여호와의 집(성전) 뜰에서’를 의미한다. 마지막 ‘할렐루야’를 외침으로 시인은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감사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환란 때에 기도하라

이 시인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기도했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일을 당한다. 보통의 경우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두려워하며 낙심하거나 심하면 자포자기 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겠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고난에 예외는 없다. 사망과 고통에 빠져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믿음’의 기도다. ‘믿음’은 역경을 양식 삼아 배양된다.

우리가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쳐 있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반드시 하나님은 기도하는 이에게 응답하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신 이유다.

2.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에 최악의 상태에서도 인내하며 희망을 잃지 않게 도와주신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발이 넘어지려 할 때 하나님의 오른손이 붙들어 주셨다. 이는 하나님의 긍휼하신 속성 때문이다. 우리가 넘어지나 아주 넘어지지 아니함은 하나님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했다.

하나님은 낮에도 밤에도 우리를 지키시며 실족치 않게 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그 영혼이 평안과 안전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사람들이 그렇게 목마르게 찾는 평안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찾을 수 있다.

시편 117편 주해와 적용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본문의 개요

117편은 116편과 여러 가지 면에서 관련성을 가지는데, 116편이 여호와께서 자기 종을 죽음에서 건지시며, 따라서 구원받은 자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고 노래한다면, 시편 117편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할 근거가 자기 백성을 향하신 그분의 인자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 시는 두 구절로 구성된 간단한 찬양시다. ‘찬양하라’는 이스라엘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에 주어진 명령이다. 그 이유는 그분의 인자하심 때문이다. 더구나 열방에게 찬양을 요청함은 시인이 믿음의 눈으로 메시아 시대에 이방인들이 구원에 참여할 것을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인자’와 ‘진실하심’은 함께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단어들로 전·후반절에 쪼개어 배치되고 있다.

본문 주해

“칭송하다”(1절)란 말은 ‘찬양하다’란 의미로 아람어에서 차용되었다.

모든 나라들 곧 모든 백성들은 온 세상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들이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하심이다. 지금 시편 기자는 그분의 은총에 감격하는 수많은 백성들을 마음에 품고 외치고 있다. 그분의 속죄 은총을 입은 자들은 찬양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

1절에서는 열방을 향하여 찬양을 촉구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우리에게 행하신”(2절) 여호와의 ‘인자와 신실’이 크고 영원하다고 한다. 시인은 이방인들이 메시아의 구원에 참여할 것을 예기하고 저들의 찬양을 촉구한 것이다.

이 시는 시편의 가장 짧은 시지만 세계 선교적 시야에서는 거목(巨木)이라고 할 수 있는 시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하심 때문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이방인들 가운데서 전파하게 하신 것은 오로지 이방인들을 향한 긍휼하심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징벌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상에게 하신 자신의 약속에 대한 여호와의 진실하심은 영원하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완악해져서 추방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인 믿는 이방인들 속에서 실현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우리의 모든 위로의 원천이고, 하나님의 진실하심은 우리의 모든 소망의 토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가지에 대하여 여호와를 찬송하여야 한다.

2.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실하심 때문이다

진실에 해당하는 ‘에메트’라는 말의 기본 개념은 ‘지지하다’, ‘버티다’, ‘지탱하다’의뜻이다. 이 말에는 ‘흔들리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다, 지속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약속하시면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으신다. 어떤 상황이 생기고 어떻게 상황이 바뀌더라도 변치 않으시는 분이다.

하나님께는 약속을 지켜내실 만한 힘과 말씀하신 것을 유지하실 만한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시편 118편 주해와 적용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신다

본문의 개요

어떤 이는 시편 118편이 시편 113~117편과 같은 ‘할렐시’는 아니지만, 시편 107편과 함께 그 사이에 있는 시편들을 둘러싸는 일종의 ‘수미쌍관’(首尾雙關)(인클루지오)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앞에서 언급된 시편과의 연관성을 고려해 본다면 단어 면에서 여호와, 인자, 열방 등이다시 언급되며, 사고 면에서 보자면 시편 117편이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라고 했다면, 시편 118편은 그분을 찬양해야 하고, 그분의 속성과 행사들을 공적으로 선포해야 한다고 노래한다.

시편 117편이 여호와의 인자와 진실하심이 영원하심과 찬양의 주제였다면, 118편에서는 그분이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에 찬양하라고 권고한다. 즉 둘 다 그분의 속성을 찬양의 이유로 제시하고 있다.

내용상 본 시편의 1~19절에서는 백성들이 성전으로 제물용 짐승들을 끌고 올라가는 행렬을 묘사하며, 19절에서는 이 행렬이 성전 문 입구에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20~27절은 그 절기 행렬을 맞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모습을 묘사한다.

28절이 도착한 자들의 화답이라면, 29절은 전체가 어우러져 있는 찬양이다.

본문 주해

1. 제1부(1~19절)

1) 제1연(1~4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이 행은 마지막 29절과 함께 이 시를 둘러싸는 ‘수미쌍관’(首尾雙關)을 구성하고 있다. ‘찬양하라’(1절)는 권고는 예배의식과 연관될 것이다(원문에서 ‘감사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두’의 일차적 의미는 ‘찬양하라’이다). 솔로몬이 성전건축 후에 언약궤를 다윗성에서 성전으로 안치시킬 때나 성전봉헌식 때도, 그리고 여호사밧 왕 때 전쟁에 진군할 때도, 혹은 제 2성전의 토대를 놓을 때에도 이 내용으로 찬양했다.

‘찬양하라’는 권고는 찬양의 이유를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라고 제시한다. 즉 그분의 속성을 인하여 찬양하라는 것이다.

이 시의 내용을 일괄해 보면 1~19절은 백성들이 성전으로 제물용 짐승들을 끌고 올라가는 행렬을 묘사하며, 19절에서 이 행렬이 성전 문 입구에 선 모습을 보여 준다. 20~27절은 그 절기 행렬을 맞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모습을 제시한다. 28절이 도착한 자들의 화답(和答)이라면, 29절은 전체가 어우러져 올리는 결론적 찬양이다.

‘이스라엘’이나 ‘아론의 집’ 혹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2절) 등에게 권고하는 것은 시편 115편과 흡사하다. 아론의 집은 물론 제사장 계층을 말한다.

‘인자하심이 영원하다’(3절)는 것은 그분의 언약에 근거한 ‘사랑’이 다함이 없다는 말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소수에 속한다(출 18:21; 말 3:16).

2) 제2연(5~7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기 ‘나’는 단수지만 집단을 대표하는 집합적 ‘나’다. 이들은 추방 후 귀환한 자들로 성전건축 당시 여러 방해 책동들 가운데서도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여기 “고통”(5절)이라고 번역된 말은 ‘묶이다’, ‘속박되다’를 의미하는 동사와 연관되며, ‘협소한 처지로 내몰림’,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태’를 뜻한다.

3) 제3연(8~13절): 곤경에서 구원하시다

제2 성전 건축때 아니면 예루살렘 성벽 재건 때, 여호사밧 왕 때, 암몬, 모압, 에돔족속이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침공한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공동체의 대표를 의미한다.

10절에서는 ‘모든 열방’이 주어로 명시되었으나, 11절에서는 독립 주어가 생략된 대신 ‘둘러싸다’란 동사가 두 번 제시되어 강조되었다.

‘내가 끊으리로다’(12절)는 동사는 미완료형태로 사용되었으나, 문맥상 이 동사는 완료된 행동을 뜻한다. 원수들은 ‘가시덤불의 불 같이 소화(消火)되었다’고 진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끊었다’, ‘가시덤불’ 혹은 ‘가시’는 확 타올랐다 금방 사그라지는 허무한 불길을 말하기 위해 가시덤불의 불이란 표상을 사용하였다. 원수들은 기세(氣勢)등등하게 덤비지만 졸지에 파멸당하고 만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가시덤불에 붙은 불의 표상은 가치 없는 가시나무를 모아 불태우듯 원수들도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살라지게 될 것을 말한다.

주님은 우리를 결코 넘어지지 않도록 붙드실 것이다.

원문에는 ‘네가 나를 아주 난폭하게 밀쳤다’(13절)로 표현되어 그 결과로 내가 넘어질 뻔했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여 사용하였다.

4) 제 4연(14~18절): 구원하심을 인하여 찬양

“오른손”(16절)은 하나님을 의인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이며, 그분의 권능과 힘의 상징을 표현한다. ‘권능을 베풀다’라는 표현은 ‘부를 얻다’를 의미하거나, ‘용맹하게 행하다’, ‘힘을 보이다’를 의미한다. 힘을 보인다는 것은 과시(誇示)적 의미라기보다, 자기 백성을 돕기 위해 권능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오른손을 높이 드는 행동은 맹세할 때의 자세이기도 하다(단 12:7). 여기서는 원수를 치시려는 동작일 것이다.

5) 제 5연(19절): 의의 문을 열라

“의의 문”(19절)은 의식상의 부정(不淨)이나 정함보다는 도덕상의 완전함이나 순종의 여부에 강조점을 둔 듯 보인다. 시편 15편이 말하는 ‘주의 성산’이나 ‘주의 장막’은 성소를 지시할 것이다. 시편 24:3 이하에서도 성소에 들어갈 자의 조건이 도덕적 측면에서 언급된다.

그렇다면 여기 고려중인 ‘의의 문’은 예루살렘 성문이나 ‘성소’의 문이나 모두 지시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앞의 서론에서 언급한 바대로, 이 시가 제2 성전완공식 때의 정황을 묘사한다고 이해하면, 이 ‘의의 문’은 성전 문이 된다.

2. 제2부(20~27절): 백성의 행렬을 맞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화답

19절에서 “의의 문”을 열라 하였다면, 이제 성소 문 안에 있던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그 백성들의 요청에 화답한다.

“여호와의 문”(20절)은 ‘여호와께 속한 문’이라는 의미다. 19절에서는 ‘의의 문들’이라 했지만, 여기서 ‘여호와의 문’이라는 단수형을 제시하는 것은 여러 문들을 대표하는 한 문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의인들’이 들어가리라고 하는 진술은 15절에 언급된 의인들, 곧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하나님께 경배하고 교제하기 위해 들어가는 것이다. 이 성전 문을 ‘의의 문’이라 칭한 것은 언약 백성이 의의 생활, 곧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한 생활을 할 때 통과할 수 있는 문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제2성전건축을 완공한 후에 이런 찬양을 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기들은 이방인들에게 버림받고 경멸당한 모퉁이 돌이었는데 그 돌이 마침내 하나님의 손에서 귀하게 사용되게 되었다며 완공된 제2성전건물을 바라보면서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고백은 새롭게 완공된 성전을 대할 때 나타난 시적 영감(靈感) 덕분에 가능하였다.

사실 제2성전의 토대가 되는 그 ‘모퉁이 돌’과는 상관이 없는 표상이지만, 그럼에도 새롭게 건축된 건물 앞에 선 시인에게는 이런 건축 표상이 이스라엘의 회복된 모습을 지시하는 좋은 자료로 마음에 떠올랐을 것이다.

모인 무리들은 제2성전봉헌식에 기쁨으로 찬양하였다. 혹은 전쟁에 승리한 그 날을 기념하면서도 이렇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제 2성전완공 후에 귀환한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치하에 여전히 있었으므로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 다윗과 솔로몬 때의 부강한 나라를 재건해야 할 책무가 있었다.

그런 목표들을 놓고 이렇게 기도했는지 모른다. 혹은 전쟁의 승리 후에 나라의 앞날과 발전을 위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성전 언덕에 서 있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19하절에서 언급된 백성의 대표 곧 ‘내가 들어가서’(26절)라고 노래한 그 대표의 성전(聖殿)의 입장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그 백성의 대표는 어쩌면 추방이후 귀환한 유대인들을 지도했던 다윗 후손 스룹바벨인지 모른다. 봉헌식 혹은 절기 예배에 참석하러 올라온 자들은 제사용 짐승들을 끌고 왔다.

‘빛을 비추다’(27절)는 ‘구원하다’라는 말과 같다. ‘줄’이라 번역된 말(아봇)도 ‘가지’란 의미를 갖는다.

3. 제3부(28~29절): 도착한 자들의 화합(28절)과 전체의 합창(29절)

이 구절이 성전에 도착한 무리들이 발하는 고백이라면, 29절은 성전에서 저들을 맞은 성직자들의 화답이다. 마지막 문장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29절)는 ‘내가 당신께 찬양하리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응답하시는 하나님

‘경외’란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하여 가질 수 있는 심리적 반응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에는 그분에 대한 두려움, 놀람, 경탄과 그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긴장이 늘 나타나기 마련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우리는 말과 행실을 조심하게 된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모습이 경건이다. 이런 경건한 삶을 영위하는 자들에게는 영적 긴장감이 느껴진다.

시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이들에게 그분을 찬양하라고 외치는데, 이는 그분의 속성 때문이다. 그분의 거룩하심과 신실하심과 두려우심과 전능하심을 체험한 자들은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험하는 자들에게 찬양하라는 권면은 그분을 경외함을 삶의 방식으로 가진 자들에게 자신의 존재 본질 곧 존재 양식에 충실하라는 권면이다. 그분을 찬양함에서, 그분과 가지는 교제에서, 성도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게 된다. 그 목적으로 지음 받았음을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부족과 연약함과 무지와 허물들은 그분의 임재 하에서 그분을 높이고, 경배하고, 찬양하면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다. 나의 불신실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신실하게 사랑해 주신 그 온전한 사랑 앞에 내 자신을 내던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는 상태에서 그분을 찬양할 때, 찬양은 하늘 보좌에 상달된다.

2. 하나님께 감사하라

우리는 생명이 있음을 인해 감사해야 할 것이다. 창고에 아무리 풍성한 곡식을 쌓아 놓았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그날 밤에 생명을 거두어가시면 그 풍성한 곡식이 아무 것도 아니며 내 것이 될 수 없다.

생명 주셨음을 인해 감사하는 사람은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는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를 깨달았던 시인은 17절에서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고 고백하였다.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생명 있는 동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세상에 증거 하겠다는 고백이다.

생명 있는 동안에 우리에게 생명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세상에 하나님을 증거 하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시편 119편 주해와 적용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본문의 개요

히브리어 알파벳 22글자가 한 글자당 8행씩 행의 초두에 나타나 있는 알파벳 시라고 할 수 있는 시편 119편은 신명기의 사고로 충일하다. 이 시에서 말씀, 규례, 판단, 법도, 율법, 계명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바는 결국 신명기의 언약조항들을 뜻한다. 문학 양식 측면에서 이 시는 어느 유형에 고착되어 있지 않고 여러 장르들의 혼합이다. 이 시에서는 문학 장르의 경계들이 거의 사라지고 만다.

이 시편은 알파벳 시로서 히브리어 알파벳 한 글자당 8행씩 배당하여, 모두 176행으로 구성된 장시(長詩)로 그 내용은 신명기의 말씀을 순종하라는 메시지다.

전체적으로 이 시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다양한 주제는 결국 인간 삶의 복합성에서 야기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22개의 연들로 구성되었으며, 각각의 연이 사고와 구조상의 단위를 이루고, 연들은 전체 시에 흐르는 말씀에 대한 순종에 맞추어져 있다. 각각의 연들이 구조상, 사고상 단위를 이루지만, 앞에서 언급한대로, 시인의 경험을 암시하는 듯한 진술들은 이 연들의 사고가 시인의 다양한 경험에서 표출된 것이라고 믿게 해준다.

개개 연들의 자체 통일성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뒷받침되고 있다.

1) 특정한 연의 8행 전부에서 초두에 모두 동일한 알파벳 글자를 배치한다.

2) 한 연 안에서 반복되는 단어들이 사고의 일관성을 견지해준다.

3) 한 연 안에서 여러 동의어들이 사용되어 사고상의 일관성을 견지한다.

4) 동사의 동일 어간들이 반복 사용되어 통일성을 뒷받침해준다.

5) 반복된 전치사가 행의 초두에 반복 배치되어 일관성을 견지한다.

6) 성경의 특정 부분에서 사용된 단어들이나 표현들이 한 연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본문 주해

1. 알렙연(1~8절)

처음 두 행의 초두에 ‘복되도다’라는 감탄사가 나온다. 이 말의 어형은 일찍부터 감탄사 기능을 해왔다.

이 시의 초점이 되는 ‘말씀’을 지시하는 단어 여섯 개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율법’(토라), ‘증거’(에돋), ‘법도들’(픽쿠딤), ‘규례’(호크), ‘계명’(미츠바), ‘판단’(미쉬파트) 이다. 또 동사 ‘지키다’도 자주 등장한다.

사용된 단어들만 얼핏 보아도, 우리는 이 알렙연의 주제가 ‘말씀을 준수하는 자가 복되도다’라는 시 전체의 서론적 선언을 하는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시인은 자기 경험에서 말씀을 순종하여 지키는 것이 형통의 지름길임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래서 서론에서 말씀 사랑이 곧 성공의 지름길이라 선언한다.

그 길이 완전한 자, 곧 여호와의 법을 행하는 자는 복되도다! 여호와의 법은 언약조항이며,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맺으신 것이다. 그 이전 언약을 모두 폐기하지 않고 변화된 상황을 반영하여 몇 가지 조항을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다.

시내산언약이 광야생활(이동생활)을 반영하고 있다면, 모압언약은 정착생활을 염두에 두고 중앙 성소에서만 제사 드리도록 하였다. 다윗언약은 이전 모압언약의 틀 안에서 언약 백성을 지도할 왕을 다윗 후손으로 한정한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선포한 새 언약은 모든 이전 언약들이 다윗 후손 메시아에게서 최종 완성되고 성취된다는 종말론적 전망을 예고한다. 따라서 이런 사고틀에서 보면, 새 언약 백성인 신약 성도들 역시 모압언약과 무관하지 않다. 여러 면에서 모압 언약 조항들은 여전히 새 언약 성도들에게 유효하다. 율법과 복음이라는 대조적 관계로 이해하지 말고, 언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측면에서 서로간의 유기적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

‘그의 증거들’(2절)은 언약용어다. 율법(토라)이 ‘가르침’이란 뉘앙스를 풍긴다면, ‘증거’는 언약조항들이란 어감을 준다. ‘그를 구하는 자들’이란 표현에서 ‘구하다’(다라쉬)란 말은 역대기에서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을 표현하는 전문용어로 등장한다. ‘여호와를 구하다’라고 하는 말은 기도나 선지자를 통해 그분의 뜻을 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광범위하게 마음을 정하여 오로지 여호와를 찾고 구하고, 그분을 사모하며 사랑하며 그분을 즐거워한다는 의미다.

3절에서 복된 자에 대한 묘사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 한글로는 ‘행하다’(3절)란 동사가 두 번 반복되나, 원문에서 보면 상절의 ‘행하다’란 말이고, 하절에서는 ‘(그의 길에) 걷는다’(walk, 할락)는 의미다. 그분의 ‘길들’은 그분의 언약 말씀을 뜻한다. 그리고 ‘걷다’와 연관되는 명사 ‘길’은 나중 사람의 행동, 행동방식, 관습 등을 뜻하게 된다.

원문에서는 ‘당신은 명하셨다, 당신의 법도들을, 근실히 지키도록’의 어순으로 제시되었지만, ‘당신은(우리에게) 명하셔서 당신의 법도들을 근실히 지키게 하셨다’(4절)가 된다. 성도의 길들이 확고해진다는 것은 마음이 정해져서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상태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규례들’을 지킬 수 있다(5절).

계명을 주목한다는 것은 단순히 ‘보다’라는 말이기보다는 그것을 기뻐하며 받아들여 마음에 품는 것이다(6절).

‘정직한 마음’(7절)이란 5절에서 언급된 대로 ‘길이 확고한 상태’, 곧 마음이 확고히 주님께 향하고 정해진 상태다.

2. 베트연(9~16절)

여기서 가장 현저하게 부각되는 것은 일곱 행의 초두에 전치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2절만 예외다.

‘당신을 찾다’(구하다, 10절)란 말은 역대기에서 여호와를 구하는 일이 경건의 본질로 제시된 것과 같이 여기서도 마음을 주께로 오로지 향하여 그분을 구하는 일을 말한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죄에 대한 경각심이 예민하여 죄를 멀리하게 된다. ‘(마음에) 두다’(11절)란 말은 ‘숨기다’, ‘저장하다’라는 의미다.

대개 ‘묵상하다’(15절)로 번역되는 말은 영혼의 운동에만 국한하여 묘사하지 않으며, 어떤 것에 자신을 집중하나, 여러 다른 방향들로 전개될 수 있는 행동이다. 사용된 동사형은 드물게 나타나는 재귀형 동사로서 주의 규례를 스스로 즐거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3. 김멜연(17~24절)

이 연에서는 행의 초두에 부사 ‘감’이 23~24절에 연속 나타난 것을 제외하면, 행의 초두가 모두 다른 말로 장식되고 있다. 이 연에서의 사고는 시인이 곤고한 중에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느낌이다. 그를 훼방하고 멸시하는 자들은 교만한 자들이며 방백들이다. 시인은 자신을 ‘주의 종’으로 제시하여 계명에서 떠나 방황하는 자들과 대조시키고 있다.

‘후대하다’(17절)라는 말은 누구에게 ‘악으로’ 혹은 ‘선으로’ ‘갚다’를 의미한다.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18절)의 원문에서는 ‘당신의 율법으로부터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다. 이 구절의 의미는 다음 절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이 밝히 보이도록 영안을 열어 달라고 하는 기도다.

시인이 이방 땅에서 객이 되었다는 말인지 아니면, 고국에 있더라도 자신을 ‘객’(게르) 취급하여 말하고 있는지 분명치 않다(19절). 아마 다윗처럼 추방 혹은 소외를 당한 상황을 암시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나그네 같은 성도의 지상 생애를 말하는 듯하다.

‘상하다’(20절)란 말은 영혼과 관련하여 ‘쇠하다’란 의미다. 주의 판단들에 대한 사모함이 심하여(시 42:1) 영혼이 쇠할 정도다.

책망의 대상은 교만한 자, 저주 받은 자, 당신의 계명들에서 벗어나 방황하는 자, 언약 백성이라도 주의 계명에서 떠나 영적으로 방황할 수가 있으며,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책망하시고 징계하신다(21절). 언약 백성이 수치 대신 축복과 생명을 누리는 비결은 언약 말씀을 순종함에 있다(22절). ‘모사들’(24절)은 ‘조언의 사람들’ 즉, 지혜를 주는 자들이니 말씀이 그런 기능을 한다.

4. 달렛연(25~32절)

구조상 각 행의 초두에 사용된 말들을 보면, ‘길’(데렉)과 연관된 말이 26, 27, 29, 30, 32절 등에서, ‘밀착하다’(cleave to)란 말이 25, 31절에 나타나고, 나머지는 드물게 나타나는 동사(달라프: 불면의, 집이 새는 to be leaky, 28절)가 장식한다.

이 시의 주제는 ‘길’ 혹은 ‘행위’다. 시인은 주의 법도의 길, 계명의 길, 성실한 길을 택하여 행했다. 그는 거짓된 길(행위)를 미워하고, 주의 증거에 밀착하였다. 시인은 자기 ‘목’(25절)이 진토에 붙었다고 하는지 모른다. 그는 새롭게 생명을 얻기를 간구한다. ‘소성케 하소서!’는 ‘살리소서’라는 기도다.

영혼이 ‘녹다’(28절)라는 말은 ‘울다’, ‘슬픔으로 녹다’, ‘잠자지 못하다’, ‘축 늘어지다’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그리고 ‘나를 세우소서’란 여기서 ‘나를 강하게 하소서’를 의미한다.

‘거짓 행위’(29절)란 거짓된 길의 의역인데,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행위들(길들)을 낱낱이 고하며 회개할 때, 기도 응답 받은 것을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삶에서 진실하게 살고자 몸부림친다.

5. 헤연(33~40절)

이 연에는 명령형 동사가 9개나 등장하며, 그 중에서 7개가 행의 초두에 위치하여 간구적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33절)란 ‘규례, 율법, 판결들을 가르치다’라는 표현들과 같이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라는 간구다.?

여기서 ‘규례들의 도’는 결국 ‘규례들’이 지시하는 바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영안을 열어 주셔야 말씀을 깨닫고 준행할 수 있게 된다(34절). 계명의 첩경(35절)이란 계명의 길이다. ‘탐욕’(36절)은 불법적인 소득을 말한다. 불로소득(不勞所得)이나 불법적으로 취할 수 있는 이득 때문에 말씀은 무시된다. 그래서 시인은 그런 부당 이득이 아니라, 말씀에 주목하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허탄한 것’(37절)은 ‘우상들’을 의미할 수 있다. 우상을 좇는 자들은 절대 기준이 없으므로 불법적인 이득도 마다 하지 않는다. 오직 주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의 영적인 생명이 나타난다. ‘말씀을 세우다’(38절)란 말은 ‘약속을 이루소서’란 간구다. 시인은 원수의 훼방을 두려워하는데(39절) 훼방은 말로만 아니라 폭력을 동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의 판결들’이 선하다는 것은 그분의 통치가 의롭다는 말과 같다.

6. 바브연(41~48절)

사전에 실려진 ‘바브’로 시작되는 단어들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한정되었다는 사실은 시인이 이 연의 행들을 어떤 단어들로 시작하고 있는지를 예측할 수 있다. 인자는 언약에 근거한 사랑이며, 여기서 이 언약 사랑은 구원과 동의어 혹은 구원의 근거로 제시된다(41절).

주의 판결을 소망하는 것은 그분의 의로운 통치가 현실화되기를 바라는 기대다(43절). 율법의 준수야말로 언약 백성의 표시다. 구원을 여는 방편으로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언약 백성을 이방인들과 구분 혹은 성별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44절).

규례들을 묵상하는 것은 단순히 마음에 숙고하는 정도가 아니라, 영혼이 말씀으로 분기되어 감사와 찬양이 발해지는 포괄적인 영적 운동을 지시한다(48절).

7. 자인연(49~56절)

세 개의 행 초두에서 ‘기억하다’(자카르) 동사가 나타나고(49, 52, 55절), 지시대명사(이것, 조트)가 두 번(50, 56절), 나머지 행들에서는 각기 교만한 자들(제딤, 51절) 진노, 노래들(제미롯, 54절) 등이 초두를 장식하고 있다.

사고상으로 보면, 이 연은 기억하다’ 동사가 세 번이나 사용된 데서 드러나듯 ‘기억’의 연이다. 여호와께서 시인이 소망한 그 말씀을 기억해 주시라 기도하고(49절) 시인은 자신이 기억했다고 고백한다. 주의 말씀, 약속이 있다면, 고난 중에라도 소망 중에 즐거워할 수 있다. ‘소망?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이것이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이다(50절).

‘조롱하다’(51절)는 단어의 히브리어 기본 의미는 ‘허풍을 떨다’, ‘자만하게 말하다’이다. 옛 규례란 하나님께서 이전에 정하신 그 판단들 곧 그분의 통치를 위한 원리들을 지시한다(52절). 주의 율법을 버렸다는 것은 언약을 배교했다는 것이다(53절). 상징적으로 고난을 지시한다면 시인은 고난의 때에 주님을 기억하고 율법을 준수했다고 고백한다.

8. 헤트연(57~64절)

시 119편의 22개 연들 중에서 행의 초두에 동일 단어가 반복되지 않는 연은 다섯 개로서, 그 다섯 연들 중에서 헤트연이 처음이다.?처음 7행들에서 모두 시인 자신을 주어로 말한다면 마지막 행에서는 주어가 시인이 아니라 여호와의 인자로 나타나고, 여호와께서 시인을 가르쳐주시라고 간구한다.

레위인에게는 영지가 주어지지 아니하고 오직 지파들의 영지들에서 바쳐지는 십일조가 저들의 수입이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시인은 아마 레위인일 가능성이 있다(57절). 레위인은 언약의 말씀을 맡아 가르치는 자들이었다(신 33:10).

‘구하다’(58절)라는 동사는 기본형에서 ‘약하게 되다’, ‘병들다’를 의미하나, 피엘형에서는 ‘포옹함으로 부드럽게 하다’ ‘곧(노염)을 달래다’, ‘아첨하다’의 의미다.

악인의 ‘줄들’(61절)은 ‘줄’(NASB, NIV, NRSV, ELB), ‘차꼬’ 혹은 ‘덫’(LXX, NAB, NJB, LSG)을 의미한다. 두루 얽혔다는 말은 ‘둘러싸다’라는 의미다.

“여호와의 인자함이 땅에 가득하다”(64절)함은 그분의 신실하심의 표가 땅에 가득하다는 말이나 같다. 변함없이 운행하는 천체들이나 자연 만물이 오늘도 그분의 인자를 드러낸다.

9. 테트연(65~72절)

이 연에서 ‘좋은’을 의미하는 말 혹은 연관어가 다섯 번이나 행의 초두에 위치한다(65~66, 68, 71~72절). 그리고 ‘전에’를 의미하는 전치사가 한 번(67절), ‘회칠하다’(69절), ‘뚱뚱하다’(70절) 등의 단어가 행의 초두를 장식하고 있다.

사고상으로 본다면, 이 연의 챠데연처럼 여호와의 ’선하심’의 속성을 노래한다. 시인은 평안할 때 주의 선하심을 체험한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 그의 선하심을 알게 되었다. 주의 선하심은 고난 중에 깨닫게 된다(68절).

10. 요드연(73~80절)

두 개의 명사(73~74절)를 제하면 나머지 행들의 초두에는 모두 동사의 단축형(간접명령형)을 배치하여 이 요드연에 필요한 글자를 맞추었다. 이런 상황이기에, 우리는 이 연에서 간구형이 많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의 간구는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하며, 시인의 원수들을 혼동케 하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도움을 주시고, 영적으로 강건케 해주시라는 것 등이다.

시인은 자기를 언약 백성의 일원으로 간주하면서 동시에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를 노래하고 있다(73절). 시인은 자신의 경건한 자들의 친구라고 확인하고 있다(74절). 시인에게 고난을 끼치는 자들을 ‘교만한 자들’로 나타난다. 저들은 ‘무고히’ 곧 부당하게 시인을 압제했으며 혹은 거짓으로 그를 뒤엎었다(78절). 성도가 수치를 당치 않는 방법은 그분의 규례들에 온전히 행하는 것이다(80절).

11. 카프연(81~88절)

이 연에서 첫 두 행은 동일한 동사(칼라, 쉬잔하다)로 시작하고 81~82절 그리고 87절에서는 행의 두 번째 단어 자리에 이 동사가 위치한다. 84, 87~88절에서는 전치사 ‘케’(~처럼)로 시작한다. 주의 구원을 사모하여, ‘영혼이 쇠잔하다’(81절)는 것은 그가 얼마나 극심한 고난에 처했었나를 암시해 준다. ‘영혼이 쇠잔하다’(레 26:6)란 표현은 언약 백성이 배교할 때 하나님의 징계였다.

‘언제나’(82절)라는 안타까운 질문은 84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는 긍정적으로 주의 위로의 때를 묻는다면, 84절에서는 시인의 구원을 위한 원수에 대한 심판의 때를 묻고 있다. 시인은 자기의 생존할 날들이 얼마 못된다고 실망하고 있다(84절). 상황은 비관적이다.

교만한 자들은 주의 언약을 저버린 자들이며, 저들의 특징은 주를 두려워 아니하고, 그분의 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85절). ‘도우소서’(86절)에서 사용된 동사는 ‘구원하다’와 동의어다. ‘거의 다 멸했다’(87절)는 것은 시인의 목숨이 거의 경각에 달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88절에서 시인은 언약 사랑에 근거하여 자기를 살려 주시라고 간구한다.

12. 레멧연(89~96절)

92절을 제하면 이 연의 행들 초두는 모두 전치사 ‘레’로 시작한다. 89, 93절에서는 ‘영원히’(레올람)를 반복 사용한다. 시인은 이미 2절에서 자기 입술로 주의 신실하심을 대대에 선포하겠다고 다짐했다(90절). 그런데 주의 신실하심은 그분의 ‘인자’(헤세드)와 병행어로 나타난다. 주의 신실하심은 그분의 언약사랑과 동의어다.

여기서 ‘천지’(91절)란 원문에 없고 단지 ‘그것들이 서 있다’라고 표현한다. 많은 주해가들은 ‘그것들’은 ‘천지’를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고난 중에 시인은 거듭 자신이 말씀을 소망하고 즐거워하고 붙든다고 고백한 바 있다(92절). ‘주의 소유’(94절)라는 것은 언약백성의 일원을 말이다. ‘법도를 찾다’(94절)란 주의 얼굴을 찾듯, 법도를 간절히 연구하고 묵상하는 모습이다. 악인들은 언약 파기자들이며 저들은 경건한 자를 핍박한다(95절). 그럼에도 참 성도는 주의 증거들을 계속 묵상하고 생각한다.

13. 멤연(97~104절)

여기서도 카프연이나 라멧연에서처럼 시인은 마치 시편 1편의 ‘복된 자’가 자신이라고 말하는 듯 이야기하고 있다(97절). 노인은 예로부터 지혜의 상징이자, 권위의 상징이었다(100절).

그런데 이런 노인들, 장로들보다 지혜가 승하다는 것은 말씀에 따라 온전히 행하는 경건한 삶의 힘이다.

말씀을 지키는 일은 삶의 현장에서 선과 악을 분별하고 선한 길을 택하는 의지적 결단으로 가능하다.

14. 눈연(105~112절)

매 행의 첫 단어는 명사(등-105절; 자원제-108절; 생명-109절)와 완료상 동사(맹세하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첫 단어들은 하나도 동일한 것이 없이 다양하다. 여기서도 시인은 말씀을 칭송하고 자신의 말씀에 대한 신실한 자세를 노래하고 있다.

‘등’과 ‘빛’(105절)은 동의어로 나타난다. 이 등불 표상이 어둠을 물리친다면, 말씀은 영적인 어둠을 물리친다.

‘맹세하고 굳게 정하다’(106절)란 맹세하고 그 맹세를 ‘확정하였다’는 것이다. ‘내 입의 낙헌제’(108절)란 ‘내 입의 자원제’이지만, 약간 의역해서 ‘내 입으로 기꺼이 드리는 찬양’이 된다. 문자적으로 ‘내 영혼이 내 손바닥 안에 있다’(109절)는 뜻이며 이는 ‘위협에 처해지다’라는 의미다. 시인의 생명이 위험에 처한 것은 여기서 보듯 원수들이 그를 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110절). 111절은 문자적으로 ‘내가 당신의 증거들을 영원히 기업으로 상속 받았나이다’라는 의미며, ‘마음을 기울이다’(112절)란 ‘~을 할 마음이 생기도록 하다’란 의미다.

15. 사멕연(113~120절)

사멕연의 행의 초두를 장식하는 단어들은 이 시에서 한번 나오는 단어들이다. 그런데 이 연에서 부각되는 사고는 악인들이 시인을 압제하는 모습이다.

‘두 마음 품는 자들’(113절)은 엘리야가 그 백성들을 향하여 ‘두 나누어진 의견들 사이에서 머뭇거리는냐?’(왕상 18:21)라는 표현에서 나타난다. ‘은신처’와 ‘방패’가 함께 나오는 구절은 이곳 밖에 없다(114절). 주님은 우리가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 우리를 사방의 위험에서 보호하시는 분이다. 시인은 악인들로부터 구원을 바라고 기도했지만, 여기서는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악행자들에게 떠날 것을 명령한다(115절).

‘붙들다’(117절)란 말은 낙담과 좌절에 빠진 자를 ‘떠받치다’, ‘부양하다’, 혹은 음식을 주어 ‘강건케 하다’란 의미다.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 방황하는 자들은 배교자들이며, 이들은 영적으로 타락한 자들이다(118절). 의인은 악인의 심판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지만 경건한 자들에게 기쁨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손을 맞잡고 간다 (120절).

16. 아인연(121~128절)

이 연에서는 시인이 행한 일과 그에 응하여 여호와께서 행하실 일에 초점이 모아진다. 시인은 자기를 여호와의 종으로 소개한다. ‘압제자에게 버리지 말아주소서’(121절)라는 간구는 압제자들의 손에 넘겨주지 말기를 간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의 종’(125절)이란 시인이 레위인이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왕과 같은 지도자였기 때문인가? 원수들이 주의 언약을 ‘파기했다’(126절)는 동사는 기존의 언약을 파기하는 동작을 묘사하는데, 사람들 간의 언약이건, 하나님과의 언약이건, 언약파기는 저주를 가져오는 행동이었다. 여기 ‘정금’이란 다른 이물질이 섞이지 않고 ‘순수한 금’(127절)이라는 의미다.

17. 페연(129~136절)

이 연은 여호와의 말씀(129~130절), 시인의 진리를 향한 열망(131절), 하나님께 조명과 구원을 간구(132~35절), 마지막으로 악인에 대한 탄식(136절) 등을 다룬다. ‘기이하다’(129절)는 것은 인간의 수준을 넘는 초자연적 속성을 나타낸다.

‘당신 말씀의 열림이 빛을 비춘다’(130절)는 당신 말씀의 계시가 빛을 비춘다는 의미다. 134절의 ‘사람’이란 말씀을 무시하는 악인을 지칭한다. 시인은 민수기 6장 말미에 기록된 제사장 축복기도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한데(135절) 이는 시인이 제사장이었거나 레위인이었다면 그런 기도에 익숙했을 것이다. 그는 백성을 축복하는 자리에서 떠나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간구한다.

18. 챠데연(137~144절)

‘의, 의로운 행동’(체덱, 체데카)과 연관된 단어들(챠디크, 체데카, 체덱 등)이 세 행들의 초두에 위치하고 있다. 사고상으로 본다면 여호와 의로움과 시인 자신의 곤경을 묘사하는 이 연은 이 시의 종결을 준비한다. ‘정미하다’(140절)란 말은 ‘제련되었다’, ‘입증되었다’는 것으로 그 의미는 제련된 철이나 금처럼 순수하다는 의미다. ‘미천하다’(141절)란 ‘미약하다’는 의미며, 별 볼일 없는 것을 가리킨다. 시인은 협소한 처지, 곧 사면초가의 큰 곤경에 떨어져 있다. 그런 처지에서 유일한 낙은 ‘주의 계명’이다(143절). 144절의 ‘주의 증거는 영원히 의롭다’라는 번역은 원문의 단어 순서를 주목해 볼 때에 ‘당신의 의로운 증거들이 영원하다’처럼 되어야 한다.

19. 코프연(145~152절)

이 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사용된 단어들이 기도와 연관된다는 점이다. ‘부르짖다’, ‘내 목소리’, ‘응답하소서’, ‘구원하소서’, ‘들으소서’ 등 사고상으로 이 연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응답을 호소한다. 여기서나 다음 절에서 문장 초두에 위치한 동사(카담)는 ‘선두에 서서 가다’, ‘만나러 가다’, ‘일찍 행하다’, ‘예기하다’ 등의 의미다(147절). 원문대로라면, ‘내가 일찍 행하나이다. 곧 내가 부르짖나이다’가 되겠지만 ‘일찍 행하다’와 ‘부르짖다’가 합쳐져서 ‘내가 일찍 부르짖나이다’가 될 것이다.

시인은 깨어서 말씀을 묵상하며 저녁 내내 새벽 동이 트기까지 뜬 눈으로 주를 앙모한 듯하다(148절). 시인은 기도 응답의 근거를 그분의 언약 사랑에 둔다(149절). ‘궁구하다’(152절)라고 번역된 말은 ‘알다’란 의미다.

20. 레쉬연(153~160절)

‘소송하다’(리브, 154절), ‘먼’(라호크, 155절), ‘긍휼’(라하밈, 156절), ‘많다’(람빔, 157절), ‘머리’(로쉬, 160절) 등의 단어가 행의 초두를 장식하고 있다. ‘원한을 펴다’(154절)란 말은 ‘내 송사를 변호하여 주소서’라는 말이다. 특히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송 건을 담당하여 정당하게 판결해 주시라는 간구다.

‘궤사한 자’(158절)는 신의를 저버리고 악하게 행동하는 자이며, ‘슬퍼하다’(158절)란 ‘구역질하듯 역겨움을 느끼다’란 의미다. 악인의 말씀 거역 행위에 메스꺼움을 느낀다. 악인에 대조시켜 시인은 자신의 주의 법도 사랑을 자랑한다(159절). 주의 말씀의 ‘강령’(160절)이란 그 말씀의 ‘본질’을 지시한다.

21. 신연(161~168절)

히브리어 알파벳은 22자로, 여기에는 ‘신’과 ‘쉰’의 구분이 없고 한 글자로 취급된다. ‘신’ 글자는 알파벳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에 해당된다. 방백들은 통치자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관들이 까닭 없이 시인을 핍박하지만, 시인은 주의 말씀에 대한 경외감으로 충만하다(161절). 162절에서 전쟁의 전리품을 다량 얻어 입이 벌어진 승리자처럼, 시인은 주의 말씀을 즐거워한다. 이런 묘사는 시인의 자기 업적 자랑의 일종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의 순수한 열정이 드러나 있다. 하나님의 ‘의로운 규례들’(164절)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을 하루에 입곱 번이나 찬양한다.

22. 타브연(169~176절)

‘깨닫게 하소서’(169절)란 간구는 ‘구하소서’란 간구나 유사한 뉘앙스인지 모른다. ‘발하다’(171절)란 말은 아랍어에서 ‘거품을 내다’라는 의미다. 마치 샘이 물거품을 품으며 물을 솟구치듯 시인의 입술은 찬양을 발한다. 시인은 앞 절에서 ‘입술이 찬송을 발한다’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다’(172절)라고 묘사한다.

‘법도들을 택하다’(173절)란 ‘법도들을 사랑하다’, ‘구하다’ 등의 표현과 의미가 동일하다. ‘사모하다’(174절)란 동사는 40절에서 나타난 바 있지만, 시인은 주의 구원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176절에서 시인의 부정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는 직유법은 자기 업적을 주장하던 그의 모습과 대조되며, 그의 솔직한 고백을 생동감 있게 만들어준다. 악조건에서도 말씀에 대한 헌신을 갖는 시인 자신의 자세를 강조하면서 본 시를 마무리 짓는다(176절).

설교를 위한 적용

1. 말씀이 소망이다

성경 말씀이 소망이 되는 자는 순종할 수 있는 반면, 절망하는 자는 절대로 순종할 수 없다. 희망이 사라진 자는 불순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순종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말씀을 대할 때마다 그 말씀이 나에게 소망과 희망이 되어야 한다. 말씀 속에서 꿈을 꾸어야 한다. 말씀 속에서 용기를 얻고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넘쳐야 한다. 현실은 힘들고 어렵고 괴로워도 내일에 대한 희망의 빛을 말씀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

2.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우주 만물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시편 19편에도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이 대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에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눈으로 분명히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행할 최고의 의무 아래에 있음을 고백하여야 할 것이다. 시험하는 자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규범으로 삼든 말든 그것은 사람들의 자유며,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선한 것일 수는 있지만 반드시 선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논리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단은 우리의 첫 조상에게 하나님의 명령에 의문을 품도록 가르쳤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이 확고하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시편 120편 주해와 적용

내 생명을 건지소서

본문의 개요

시편 119:176(“잃은 양같이 내가 유리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에서 시인은 자신을 ‘잃은 양같이’ 유리하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양은 목자가 찾아 집으로 데려가 양육 보호해야만 한다.

시편 119편 기자는 온갖 핍박과 배교자의 악행으로 인하여 자신을 잃은 양에 비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시편 120편의 기자도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에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런 연관 고리가 시편 119편과 120편의 유기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120편은 1~4절과 5~7절,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전반부는 시인을 해하려는 모함과 그것에서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가 주제로 다루어지고, 후반부는 이방인들 가운데 오래 거하여 지친 모습을 노래한다.

본문 주해

1. 제1연(1~4절): 거짓된 입술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여기 원수들은 입술로 시인을 공격하고 있다. 시인은 부르짖으며 응답을 호소한다. ‘내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1절)에서 ‘여호와께’라는 표현이 문장 초두에 위치하여 강조된다. 시인은 강조를 위해 ‘거짓된 입술’, ‘사기 치는 혀’(2절)와 같은 사고를 두 개의 표현으로 반복 제시한다. 시인은 자기를 모함하는 사람의 ‘혀’(3절)를 그 사람의 인격체로 떼어내어 상대한다.

4절의 ‘장사’는 ‘용사’다. ‘로뎀나무’는 주로 이스라엘이나 주변국의 와디 분지에서 서식하며 높이가 2미터 정도 자라는데, 그 회색 가지들은 거의 연중 내내 그냥 있다가, 장마철 마지막에야 아주 작고 엷은 잎을 갖는다. 이 관목이 바람에 흔들리면, 빛을 반사하여 멀리서도 잘 보인다 .

2. 제2연(5~7절): 이방인 중에 장기 체류로 지친 모습

시인은 부득이한 사정에서 이방인들 가운데 피신했으나 결국 그들 역시 시인에게 적대 행위를 자행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주의 경건한 무리들과의 교제를 사모한다.

전·후반절의 병행사고나 구조는 전반절의 ‘메섹’ 역시 ‘메섹의 장막 중에’라고 이해하게 한다. 메섹은 북해 연안 야벳 후손들이라면, 게달은 이스마엘의 후예로 동방의 유목민이다(렘 49:28~29; 겔 27:21). 지형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이 시에서는 시인을 적대하는 원수들의 표상으로 이렇게 함께 제시되었다.

메섹은 에스겔 38:2~3과 39:1에서 종말에 회복된 이스라엘을 침공할 원수로 나타나고 게달은 이사야 21:16~17에서 전쟁에 능한 자들이라는 암시를 주는 듯하다. 창세기 16:12에서 이스마엘의 후예인 게달 역시 그런 생활방식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인을 모함하는 원수들이 이렇게 공격적이고 야만적인 것이다. ‘내 영혼이(=내가) 오래 거하였다’(6절)라고 할 때, 전치사에 3인칭 단수 여성 인칭 접미어를 합하여 동사 뒤에 배치하고 있다. 이는 묘사되는 행동을 다시 주어에 상기시키며 강조하는 수법이다. ‘원수들이 전쟁한다’(7절)는 것은 포학하고 거짓된 말로 시인을 치고 사장(死藏)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말한다.

설교를 위한 적용

시인에게서 우리는 지극히 선한 자의 성품을 보게 된다. 그는 비록 전사였지만 화평을 원하므로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살고 그 누구와도 반목하며 살려고 하지 않는다. 시인은 화평을 사랑하고 화평을 추구한다. 그의 기쁨은 화평에 있다. 그는 화평을 위하여 기도하고 화평을 위해 애쓰며, 화평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고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어떤 것과도 결별할 수 있다. 그는 화평을 원하고,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까지 증명해 왔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다.

시인의 원수들 즉 지극히 악한 자들의 성품은 다투기를 좋아한다. 시인은 모든 예를 갖추어서 인자하게 말하였고, 서로에게 좋은 방법을 제안하였으며, 사리를 밝혀 말했고, 사랑을 말했지만, 그의 원수들은 인내하지 않은 채 불화만을 가져왔다. 그들은 매우 사나운 자들이며, 남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이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소행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되고 우리가 화평을 추구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서 화평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서도 안 된다.

우리는 이러한 악으로 시험을 받을 때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려고 힘써야 할 것이다.

시편 121편 주해와 적용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본문의 개요

이 시편 해석의 중요한 관건은 1~2절에서 일인칭 단수가 나타나고, 나머지 절들에서 이인칭 단수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또한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지키신다’는 용어가 각각 여섯 번 언급됨으로써 본 시의 주제를 암시하고 있다.

본문 주해

시편 121편에서 ‘산을 향하여’(121:1)에서 ‘산’은 단수가 아닌 복수형 ‘산들’(hills)이다.

즉 ‘산을 향하여’가 아니고 ‘산들을 향하여’가 올바른 해석이다.

또 이 시에서 언급하고 있는 ‘산들’이라 할 때 이는 ‘특정한 산들’을 지칭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산들’ 앞에 있는 정관사 ‘그’(the)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많은 산들 가운데 알려지지 않은 불특정한 산들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편 121편의 저자는 물론,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 법한 특정한 ‘산들’을 암시하는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을 통해 얻은 이 정보는 시편 121편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다.

예루살렘은 수도로 정하기에 적합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장소였다. 특별히 이 지역은 해발 800m의 높은 고지대에 위치해 있었기에 적군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천연적인 요새로서 가능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성읍은 점차 확장되어 솔로몬시대에는 예루살렘이 더욱 확장되었다. 적군이 침략해 올 경우에는, 동쪽이나 서쪽 혹은 남쪽의 산을 넘어 이곳 여부스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을 감수했어야 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동쪽으로는 기드론 골짜기를 중심으로 산들로 싸여있는 천연 요새였으며, 서쪽으로는 중앙 골짜기와 힌놈 골짜기로 보호되는 성읍이었다.

여부스 성읍의 이러한 지정학적 환경은 전략적인 면에서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세력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유리하였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존과 안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출애굽에서 다윗에 이르기까지 수도다운 수도를 경험하지 못했던 방황의 역사를 가진 쓰라림의 민족이었다.

이러한 역사 가운데에 하나님의 존재는 단순히 종교행위의 대상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생명 자체였다. 여호와는 그들의 목자가 되셨으며, 그들을 마른 광야에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셨던 생명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와 도움의 손길이 없었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였다는 사실을 인식하였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야 한 가운데에서 홍해를 가르는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체험하였기에 그들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유일하다는 신앙고백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 없는 이스라엘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과거와는 달리 천연적 요새였던 여부스 성읍이 그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었다.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에서 자리 잡고 있는 든든한 방패가 되는 산들이 지금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가장 안전한 보호막이 되어 그들을 적군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산들과 성읍은 그들에게 있어서 점점 의지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외적 환경의 이점은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열정을 식히는 요인이 되었다는 추론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외적 환경의 편안함과 안전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출애굽을 거쳐 광야에서 역사하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방패 역할을 하였던 그 산들은 점차 하나님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였고, 이스라엘은 그 산들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였다. 이는 이스라엘이 비록 타민족으로부터의 생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은 없더라도, 그들 가운데 굳건히 자리 잡고 있어야 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상실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영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역사 가운데에서 외적 환경과는 상관없이 광야 한 가운데서 만나와 메추라기와 물을 공급받는 이상 하나님이 함께한다면 그들에게 더 이상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현재 그들은 이전보다 훨씬 좋아진 외적 환경에 있었다. 수도는 그들에게 안전을 가져다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희석시키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비록 현재의 수도가 외적으로는 안정적이고 견고해 보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는 환경과 수고는 헛될 뿐이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외적인 환경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기를 인식한 시편 121편의 기자는 이제 믿음의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영적 각성을 위한 메시지의 선포였다.

시편 121편은 단순히 평범한 풍요로움 가운데에서 나오는 감상적인 시가 절대 아니다. 하나님을 잊어 가고 있는 이들에게 향한, 영적 각성을 위한 시가 형식의 애끓는 선지적 절규였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상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마치 병풍과 같이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도움이 그 산들에서 오지 않느냐고 반문하였다. 이러한 백성들을 향해서 시편 121편에 나타난 신앙인은 단호하게 외치고 있다.

설교를 위한 적용

진정한 도움은 ‘그 산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산들’을 지어 주신 여호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시편기자는 말한다. 외견상으로는 여부스 성읍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도움이 되어 그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어 보이나, 진정한 도움은 산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사막에서는 그 산들과 같은 방패는 없었으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지켜 주셨다.

그렇기에 오히려 외견상으로는 약해 보이나 가장 강할 수가 있었다. 그들이 약할 때 가장 강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광야생활에서 얻은 역설적인 진리를 그들은 점차 망각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허수아비와 같은 그 산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산을 지어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라. 오직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구원이 될 것이며, 진정한 도움이 되리라. 그 산들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적들로부터 너희를 지키시리라.

시편 121편의 신앙인은 그래서 ‘여호와’와 ‘지키다’라는 용어를 반복하여 외치고 있다. 이 시는 ‘여호와께서 너를 지키리라. 네 우편에서 그늘이 되리라.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라, 다른 이가 아닌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리라, 다른 이가 아닌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실 것이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도움이시다.

시편 122편 주해와 적용

평안을 구하라

본문의 개요

표제는 ‘다윗의 올라가는 노래’라고 한다. 만약 이 시편의 저자가 다윗이라면 본문의 정황에 대해서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피해 잠시 예루살렘에서 떠나 있다가, 그곳에 다시 귀환할 때의 설레는 마음의 흥분을 노래한 것이라고 짐작해 봄직하다.

그런데 두 개의 히브리어 사본들과 70인역, 탈굼역 등에서 ‘다윗의’란 표현이 없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내용면에서 볼 때 본 시는 시온의 노래들처럼, 예루살렘에 관해서 노래한다.

형식면에서도 이 시는 시온의 노래들과 유사한 요소들을 담고 있다. 시인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사고면에서, 그리고 형식상 세 개의 연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1~2절은 순례의 기쁨을 묘사하고, 3~5절은 예루살렘 예찬, 6~9절은 예루살렘에 대한 축복과 기원을 담고 있다.

6절에서 시인은 언약백성 모두가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고, 사랑할 것을 권고한다. 또한 9절에서는 시인 자신이 예루살렘을 축복할 것을 서약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이다.

본문 주해

“조밀한 성읍”(3절)에서 ‘조밀한’은 ‘연합하다’는 동사의 수동태로 ‘서로 견고히 연결된’ 정도의 의미다. 이것은 느슨하게 아무렇게 건물들이 배치되지 않고 꽉 들어차게 빈틈없이 잘 배치된 도시를 연상시킨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처소며 이곳으로 이스라엘 성년 남자들은 일년 3차 절기 시에 올라가 절기를 지켜야 했다(4절). 문장 초두에 ‘왜냐하면’을 두어야 한다. 그래야 5절이 4절의 이유를 제시하게 된다. ‘판단의 보좌’(5절)는 공의 시행의 보좌들을 지시하며 이는 곧 다윗왕가의 보좌들이다. ‘보좌’는 권세의 상징이며, 그곳이 곧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처소다. 그렇다면 ‘보좌들’은 왕의 보좌만 아니라, 그를 보좌하는 재판관들이 앉는 자리들도 함께 여기에서 지시할 것이다.

한편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는 직역한 것으로 ‘그들이 심판의 보좌들에 앉았다’가 된다. ‘그들’은 다윗 왕이나 그 후계자들, 그리고 관리들을 지시할 것이다.

“평안”(6절)이라고 하는 말은 문맥에서 볼 때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 등이 없는 안전한 상태를 의미한다. 오늘날 어떤 이들처럼 현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으로 강조하거나, 종족적 유대인들을 선민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성’과 ‘궁중’(7절)은 사실상 동의어로서 ‘바깥성벽’과 ‘성벽으로 둘러싸인 궁궐들’을 뜻한다.

이제 순례자들은 언약 안에서 형제들 곧 언약백성 된 자기 동족과 이방인 형제들을 위해 평안을 간구한다(8절).

설교를 위한 적용

1. 화평을 구하라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평 속에서 서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화평이 없고 분쟁과 시기, 싸움, 미움이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화평을 깨뜨리고 화평케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렘 9:8~9)고 했고,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 되는 복이 임한다”(마 5:9)고 말씀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8)고 하였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법칙이요, 변함없는 진리다.

우리 생활도 마찬가지다. 화평을 심으면 의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심은 것을 거두는 것이다. 심지 않고 거두는 법이 없다. 우리가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열매를 거두게 되고, 선을 심으면 선한 열매를 거두게 된다. 어떻게 하든지 우리는 화평을 심기를 기뻐해야 된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화평이 얼마나 귀한가를 깨닫고 날마다 생활 속에 화평을 심어야 한다. 이 지구상에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하여 UN이 창설되고 각 나라마다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나 어떤 정치, 혹은 인간의 논리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해야 가능하다.

항상 화평케하는 자가 되어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어야 할 것이다.

2. 교회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사단이 역사하는 곳에는 교회를 폐쇄시키고, 성직자들을 투옥시키고, 신앙의 박해가 따르게 된다. 어두움의 영이 그 속에 역사하기 때문이다. 사단이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교회를 사랑하고 신앙생활을 기뻐하는 것도 큰 은사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마음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먼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이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택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 하나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고, 육신의 세계에서 우리의 영혼이 누리는 선물 중 하나는 바로 평화다. 그래서 우리는 평안을 구해야 한다. 평안이 있을 때만이 삶의 의미를 누리게 된다.

시편 123편 주해와 적용

눈을 들어 주께 향하다

본문의 개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란 표현은 앞의 시편과 연결시키는 고리다. 회중은 오랫동안 압제를 당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에게서 구원이 임하길 바라고 있다. 이 시가 노래하는 상황은 추방 이후에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자들이 겪었던 멸시와 조소당하는 곤고한 상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시는 공동체 탄식시에 해당된다. 4절은 이 믿음 공동체가 처한 환난을 뜻하고 3절에서 구원을 호소하고, 2절은 은총을 기다리는 모습을 묘사함으로 간접적으로 기도하고 있다. 계단식 사고 이동의 기교가 여기에도 나타난다. 예컨대 1절의 ‘눈’이 2절에서 ‘종의 눈’, ‘여종의 눈’, ‘우리 눈’으로 나타나고, 2절에서 ‘상전의 손’, ‘그 주모의 손’, 2~3절의 ‘긍휼히 여기소서’, 3~4절의 ‘멸시’ 등으로 나타난다.

본문 주해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당신께 내가 내 눈을 드나이다”(1절)에서 동사 ‘거하다’ 혹은 ‘앉다’는 하나님께서 하늘보좌에 ‘좌정하다’라는 의미다. 곧 그분의 왕적 통치를 묘사하고 있다. 사람들, 특히 성도들의 운명은 하늘 대왕의 손에 달려 있기에, 멸시와 조소당하는 언약 백성의 대표인 시인은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하나님께 눈을 향한다.

종과 그 주인, 여종과 그 여주인, 우리(언약 백성)와 우리 하나님 사이의 긴밀한 관계가 비교되고 있다(2절). 그런데 종의 눈이 그 주인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여주인의 손을 주목한다. 이처럼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손’을 주목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심한 멸시’(3절)가 누구에게서 기인되었는지는 4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참 언약 백성을 멸시하는 자들은 태평하게 지내는 자들이다. 그들은 이방인들이었거나 아니면 이웃의 고통에는 눈 하나 깜짝 않는 가라지 성도였을 것이다.

‘우리의 목구멍이 태평한 자들의 조소와 거만한 자들의 멸시로 가득 찼나이다’(4절)에서 통상적으로 ‘우리 영혼’ 혹은 ‘우리’로 번역되는 말이 ‘목구멍’으로 번역된 것은 비유를 생생하게 전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목구멍은 식욕을 의미할 수 있고, 그곳에 조소와 멸시가 음식물처럼 가득 차게 되었다. 목구멍에 더 이상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저들의 조소와 멸시가 가득찼다.

설교를 위한 적용

이 시인은 성전에 올라가며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어려운 사정을 고하고 있다. 그 어려운 형편이 무엇인지 본문에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지만 그 고통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앙생활에서 진리의 빛과 고통의 흑암은 깊은 인연이 있다. 이는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거의가 인간생활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깊은 데 빠져서 헤어나기 어려울 때 중심에서부터 하나님께 부르짖게 된다. 이러한 절망의 깊은 곳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수 있고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좋은 기회다.

처한 형편이 어떠하든지 오히려 하나님께 부르짖어 아뢸 수 있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가 때때로 고통의 깊은 곳에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이는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의 깊은 곳에 있고, 앞이 캄캄하고 희망이 없어 보일 때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하는 이유다.

시편 124편 주해와 적용

도움은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본문의 개요

시편 124편은 내용으로 볼 때 ‘공동 감사시’다. 회중은 파멸의 위경에 처했으나 하나님의 간섭으로 구원을 얻었다.

이 시편에서도 우리는 계단식 사고 이동 현상을 볼 수 있다. 예컨대, 1~2절에서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 하셨더면”, 3~4절에서 “그때에…하여…했을 것이라”, 4~5절에서 “물이 우리 영혼을 잠갔을 것이라” 등이다.

사고상으로 두 연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1~5절은 파멸의 위기가 어떠했음을 묘사하고, 6~8절은 그 파멸의 위기에서 구원해 주신 여호와를 찬양한다.

본문 주해

1. 제1연(1~5절): 파멸의 위기

1절의 사고는 2절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그런데 ‘우리 편에 계시다’(1절)라는 말은 시편 121:5에서 보듯이 ‘네 우편에서 성도의 보호자, 변호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반영해준다. “치러 일어날 때”(2절)는 ‘공격할 때’라는 번역보다 더 위기감이 떨어진다. 후자는 화살이 날아드는 긴박감을 자아낸다면, 전자는 아직 대비할 여유를 느끼게 한다.

3, 4, 5절은 한 사고를 두 개의 표상으로 묘사한다. 하나는 맹수가 사람을 산 채로 집어 삼키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홍수가 사람을 덮쳐 휩쓸어 가는 표상이다(3절).

‘엄몰하다’(4절)란 ‘범람하다’란 말이다. 그리고 “시내”(나할)는 너무 약하고, ‘급류’라 해야 적절하다. 이 급류는 겨울철에 갑자기 휩쓰는 장맛비 때문에 생겼다. “넘치는 물”(5절)은 이때 생겨난 계절천을 가리킨다.

4절에서 “영혼”은 ‘목’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물이 목까지 차올라 위협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2. 제2연(6~8절): 구원하신 여호와 찬양

여기서도 사냥꾼의 표상이나 ‘입에 씹히게 하다’ 등의 표현은 개인들이 사용하는 말이지만, 공동체에 베푸신 은혜를 노래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8절의 사고는 시편 121:2에서도 이미 언급되었다.

“우리를 저들의 이빨에 먹이로 주지 않으신 야웨를 찬송할지라”(6절)는 이빨을 드러낸 맹수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표상이다. 여기 사용된 표상은 3절에 제시된 맹수가 산 채로 사람을 삼키는 그런 표상에 가깝다.

우리 “혼”과 “우리”(7절)가 병행어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네페쉬’를 ‘목’으로 본다면, 새가 올무에 ‘목’이 치이는 표상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새는 ‘그물’을 쳐 두었다가 잡았거나, ‘덫’을 놓아 잡았다.

‘여호와의 이름’(8절)이 강조된 것은 시적인 운율을 맞추기 위함이다. 단순하게 ‘우리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있도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천지를 지으신 자’ 곧 창조자는 언약 백성의 ‘구원자’시다.

설교를 위한 적용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베푸신 크신 구원을 찬양한다. 이는 비록 원수들은 매우 영악하고 악의가 가득 찬 자들이지만, 올무를 끊어 버리시고 원수들의 계획을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 사랑의 핵심 요소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화형을 당하면서도 영광스런 주님을 찬양했던 힘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또한 자기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할 수 있었던 사랑의 원자탄 같은 일들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인간 안에 그런 힘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능력, 이런 힘들은 어디서 옵니까?

그것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구체적인 능력이다. 그 능력의 기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들어 주신 십자가의 구원이 내게 능력이 된다.

인간이란 권력에 의지하는 존재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한다. 그것이 죄의 속성이다. 인간은 하나님 대신에 돈, 권력, 지식과 같은 능력을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적인 능력, 즉 인간이 노력해서, 교육해서, 훈련해서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이 주는 능력과는 전혀 다르다. 지적 능력이든, 도덕적 능력이든, 윤리적 능력이든, 물질의 능력이든 그것은 모두 땅에 속한 것이다. 그런 능력은 하늘에 속한 성령의 능력과는 다른 것이다.

하늘의 능력은 하늘로부터 온다. 영적인 능력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용서할 수 있는 능력, 원수를 위해 기도해줄 수 있는 능력은 하늘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진정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시편 125편 주해와 적용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

본문의 개요

앞의 시편과는 ‘이스라엘’이란 단어가 연결 고리로 이어진다.

이 시는 이방인이 언약 백성을 지배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편의 사고 흐름을 보면 1~3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확신을 표명하고, 4~5절에서 구원을 간구한다.

본문 주해

1. 제1연(1~3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안전

‘시온의 노래’(1절)에서 강조되는 것는 여호와께서 이방인 침략자들을 격퇴하시고 시온을 보호하시며 따라서 시온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안전지대라는 생각이다.

본 시에서는 시온 자체의 안전성보다는 여호와를 끝까지 신뢰하는 의인들의 안전성을 강조하고 있다.

예루살렘을 두르는 산들과 자기 백성을 두르시는 여호와가 비교되고 있지만, 2절에서는 비교하는 부사나 전치사는 없다. 2절에 ‘비교’의 사고가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1절에서 사용된 전치사가 2절에서도 기능을 감당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시온산은 감람산 보다는 66m 낮고, 스코푸스산보다는 76m 낮으며, 그 서편 산 보다는 33m 낮고, 라스 엘·멕카베르 높이보다는 53m 낮다고 한다. 그럼에도 여기 산들은 시온산을 중심으로 한 산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시온산의 의미는 그 지형적 높이가 아니라 영적인 탁월성에 있다.

‘악인의 홀’(笏)(3절)이 의인에게 할당된 구역에 안주(rest)하지 못하리라. 이방인의 통치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으리라.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 백성을 징계하신다 해도, 영원히 그리하지는 않으신다. 의인들이 영적 투쟁에서 지쳐 패배하기 전에, 곧 저들이 이방인들의 불신앙에 물들기 전에 원수를 파하실 것이다. 여기서 ‘의인들’은 언약 백성으로 신실한 자를 뜻한다. 이들은 ‘죄악에’ 손을 내밀지 말아야 한다.

2. 제2연(4~5절): 경건한 자에게 선을 행하소서

“선인”과 “마음이 정직한 자”(4절)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러한 자들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선하시고 정직하신’ 분이다. ‘선인’과 ‘마음이 정직한 자’는 참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계시 말씀을 따라 행동하는 자를 말한다.

4절의 ‘선을 행하다’란 말은 ‘어떤 이를 친구처럼 대하다’로도 이해된다. 여기 문맥에서는 악인의 압제에서 건져주시는 축복, 곧 ‘해방’을 주심, 또한 이방인들이나 배교자의 악에 물들지 않도록 영적 순결을 보호하심 등을 의미할 것이다.

두 종류의 악인들이 언급되고 있다. 하나는 ‘자기의 굽은 길들로 치우치는 자들’(5절)이라면, 다른 하나는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악행자들’은 우상을 섬기며, 온갖 불의를 자행하는 드러난 악인들이라면, ‘굽은 길들로 치우치는 자들’은 교활하게 숨어서 배교하는 자들이다.

‘평강’이란 재앙, 악, 무질서, 혼돈 등과 대조되는 조화와 평안과 번영의 상태다. 악행자들에게는 평안이 없다면, 참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 것이다.

설교를 위한 적용

죄악 된 길은 굽은 길이다. 죄 된 속성을 지닌 인간은 권력에 의지하고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하고 하나님 대신에 돈, 권력, 지식과 같은 능력을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옳은 길에서 벗어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의 운명은 내내 굽은 길로 행해 온 자들의 운명과 동일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비참하게 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죄로 인한 이기심과 하나님에 대한 반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바벨탑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굽어진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러한 죄의 문제는 인간의 고통을 심화시킬 뿐이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곤고한 우리의 모습만을 드러낼 뿐이다.

죄는 사망이라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죄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가는 회개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뻐할 것이며,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과정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다니고 있으나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는 경우, 하나님의 백성과는 상관이 없을 수 있다. 성경 교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거나, 봉사나 헌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죄 문제를 해결 받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데에 우리의 문제가 있다.

진정 죄의 결과는 사망임을 마음으로 믿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평강을 누려야 할 것이다.

시편 126편 주해와 적용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본문의 개요

“시온”(1절)이란 단어가 125편과 연결 고리를 구성한다.

1, 4절의 이해가 이 시편이 생겨난 정황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 관건이 된다. 1절에서 사용된 ‘쉬바’, 4절에서 사용된 ‘쉐붓’ 등의 용어는 반드시 ‘포로에서의 귀환’을 의미하지 않고 ‘상실된 번영을(fortunes) 회복시키다’,?‘포로에서 돌이키다’,?‘빚 때문에 야기된 (노예생활)에서 회복시키다’ 등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전통적으로 이 시는 포로귀환을 노래한다고 이해되었지만, 앞서 언급한 단어의 새로운 이해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주전 539년의 바벨론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이라 단정지을 수 없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처했던 어떤 곤경에서 회복된 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반드시 주전 539년의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을 지시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시편 126편의 배경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고된 포로생활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1절)라는 표현 때문인데 이는 유다 왕국의 패망과 함께 시작된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에 대한 기쁨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척이나 기뻤을 것이다. ‘기쁨’이라는 말을 표현하는 ‘리나’라고 하는 단어가 2절과 5절, 그리고 6절에서 반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도 족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는 두 개의 연으로 구성되었다.

제1연(1~4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번영을 회복시키심, 제2연(5~6절)은 1연을 교훈적 잠언으로 제시한다.

1~4절에서 우리는 ‘인클루지오’의 예를 본다. ‘여호와께서 회복시키실 때에’라는 표현이 4절에서 “여호와여 회복시키소서”라는 표현에 상응한다.

한편 2~3절에서 “여호와께서 대사를 행하시다”라는 표현이나 5~6절에서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기쁨으로”라는 표현은 계단식 이동을 보여 준다.

본문 주해

요엘 3:1을 연상케 하는 시편 126:1에서 “하나님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1, 3절)는 구절은 또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시는 주체가 하나님임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음을 주의하여 볼 필요가 있다. 시편의 신앙인은 이러한 기쁨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하였음을 보여 주는데, 이는 포로귀환의 역사 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 섭리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전혀 예측하지도, 또한 기대하지 못했던 포로귀환이라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페르시아와 비교하여 볼 때, 정치·군사적으로 너무나 보잘 것 없었던 유다가 포로생활에서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손길 때문이었다. 외견상으로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하여 시작이 된 포로귀환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것이다(대하 36장; 사 44~45장; 렘 1:1).

그런데 핵심 구절이자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절이 한 군데 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4절)라는 표현이다. 물론 바벨론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모두 유대 땅으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의미인 것은 분명하나 본문에서 ‘남방 시내들 같이’라고 하는 표현이 독자들의 머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첫째 ‘남방’의 의미는 무엇이며, 둘째 ‘남방 시내들’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지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네게브와 갈릴리지역은 강수량의 차이로 인해 전혀 다른 지형적 특색을 가진다.

4절에서 언급하는 ‘남방’이라는 지역은 정확하게 규정 지을 수 있는 고고학적인 근거가 희박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헤브론의 남쪽을 가리키며 성경시대의 남방지역은 현재보다 축소된 곳을 일컫는다.

이곳은 매우 위험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남방지역에서 약탈을 일삼으며 사막에서 거주하는 베두윈 때문이다. 다윗이 시글락에 없었을 때 남방에 살고 있던 아말렉 족속이 나타나 약탈하는 장면이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삼상 30장). 그래서 남방지역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조직 아래서만 가능하였다. 심지어 현대에도 이스라엘 정부의 정착촌이 마련되기까지 영구적으로 거주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이 지역은 강수량이 변화무쌍하다. 여름에는 말라 있는 계절천들로 인해 광활한 사막지역에 비가 오면 물이 모여 와디로 흐른다. 이러한 현상은 사막에 있는 산들과 또한 남쪽 유다지역에서 형성되는 홍수로 인하여 더욱 더 악화된다.

단 몇 시간 만에 그 지역은 갑작스럽게 위험한 급류를 형성하여 ‘남방 시내’를 이루기도 한다. 더욱이 이 지역에는 100년에 한 번씩 엄청난 양의 비가 내려 남방, 즉 광야지역에 홍수를 이루는데 평소에는 바짝 마른 상태로 있다가 100년에 한 번씩 내리는 엄청난 양의 비로 인하여 쉽게 쓸려 나가는 형질의 땅으로 되어 있어서 대홍수를 이룬다.

예레미야가 블레셋이 속해 있는 이 지역에 대하여 예언하였던 내용은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바로가 가사(남방지역에 속해 있는 지역)를 치기 전에 블레셋 사람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물이 북방에서 일어나 창일하는 시내를 이루어 그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과 그 성읍과 거기 거하는 자들을 엄몰 시키리니 사람들이 부르짖으며 그 땅 모든 거민이 애곡할 것이라”(렘 47:1~2).

이 지역에 있는 나할로 모여드는 큰물로 인하여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필자는 이스라엘 국영방송에서 1993년도 우기 때, 네게브 사막에서 거대한 모래가 엄청난 양의 물에 씻겨 내려가는 장관을 본 적이 있는데 마치 천지창조에서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이즈음에서 우리는 남방이 물이 없는 광야와 사막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시편 126편에서는 강수량이 풍부한 북쪽이 아닌 ‘남방 시내’라는 표현을 썼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남방 시내’라는 표현은 ‘갑작스럽고 빠른 변화’를 의미한다. 현재는 포로생활로 인하여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큰 물이 남방시내에 흘러 황량한 광야를 바꾸듯이, 그들의 고통의 포로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달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기도요, 간구였던 것이다.

시편 126편에서 마치 시간의 착각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시제에 관한 문제가 있다. 1~3절까지 여호와께서 대사를 행하시며 그들의 포로귀환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하셨다면, 왜 4절에서 다시 그들의 포로를 돌려달라고 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많은 논쟁이 있으나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편이 적합한 듯하다. 1~2절까지는 미완료형태로 되어 있어서 미래를 향한 소망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3절에서는 그 소망에 대한 성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3절에서 포로귀환의 소망에 대한 성취의 기쁨이었다면 왜 4절에서 다시 회복에 관한 메시지가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아마도 1~3절까지의 이야기는 주전 539년 고레스 칙령에 의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의 1차 포로귀환을 언급하고 있는 것같다.

그리고 4절의 ‘우리의 포로를 돌리소서’라는 소망의 기도는 이사야 40~55장에서 언급한 대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환’이는 예언적인 성취가 아직은 완전하게 구체화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회복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하나님의 온전한 예언의 성취를 소망하였던 것이다(사 59:9~15).

그리고 5~6절은 예언이라기보다는 격언 형식의 권면의 구절이라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간다’는 표현은 그 당시 농업을 할 때 열심히 일한다는 표현이며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는 구절은 열심히 땀 흘려 일한 뒤에 나타나는 결과다.

고통과 수고의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남방시내같이 돌리실 것이기에 비록 울며 씨를 뿌리더라도 하나님이 계시기에 추수 때 풍성한 수확으로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설교를 위한 적용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의 때에 예언을 하고 이상을 보고 꿈을 꾸는 법이다. 고난을 겪어 나가는 것이 쉽고 즐거운 길은 아니겠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이유가 아닌 하나님이 계시기에 고난의 때에도 기쁨을 소망할 수 있다.

하나님 없이는 세상이 참으로 크게 보일 수밖에 없으나, 오직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인생의 고난에 대하여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왜 고난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괴로워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과정을 통해서 주시는 놀라운 믿음의 축복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낳는다”(롬 5: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함이라”(약 1:3~4).

대장간의 뜨거운 불 속에서 쇠나 은이나 금을 넣고 달군 후에 수없이 두드리고 때릴 때 그 속에 있던 불순물, 온갖 잡물이 다 빠지고 마침내 강철, 순은, 순금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순전한 믿음과 순도(純度) 높은 믿음을 가지려면 오랜 연단이 필요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집을 떠나라고 할 때부터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을 때까지 수많은 고난 속에서 연단을 받음으로 순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결국 만국 백성의 신앙의 조상이 될 수 있다.

고난을 통해서 주의 말씀, 주의 뜻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다. 평안할 때는 하나님을 찾는 이들이 적으나, 극히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부모를 부르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천지의 근본 되시는 하나님을 의뢰하고자 함이다. 우리들도 평안할 때는 기도의 열이 적지만, 고난을 당하면 주야간 하나님을 찾게 된다.고난은 믿음의 유익을 준다.

시편 127편 주해와 적용

생사회복을 주관하시는 분

본문의 개요

이 시는 내용상 ‘지혜시’라 할 수 있지만, 지혜시의 특징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예컨대 4절에 사용된 직유나 5절의 “복되도다!” 정도가 지혜시의 특징적 요소들이다.

내용상 1~2, 3~5절 두 부분으로 나뉜다.

1~2절은 수고해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허사라는 것, 3~5절은 자녀들로 얻는 유익을 다룬다. 이런 주제는 지혜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데, 첫 주제는 전도서 혹은 잠언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가 아들의 출생 시에 회중이 불렀던 시라고 가정한다면 이 시의 초점은 3~5절에 있고, 1~2절은 모든 것이 여호와께 달렸다는 예비적 진술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통일성이 의심받는 시 가운데 하나다. 사고상 두 연관되지 않은 주제들이 혼합되어 있다. 1~2절의 사고와 3~5절의 사고가 서로 이질적이다.

본문 주해

1. 제1연(1~2절)

‘여호와께서 집을 짓지 아니하시면, 그것을 건축하는 자들이 헛되이 그것에 수고한다’(1절)고 했다. 여기 집을 건축하는 한 건축가가 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또 다른 건축가로서 그 집을 건축하는데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 집을 세우는 사람은 헛되이 수고할 뿐이다. ‘집을 짓다’(1절)는 ‘가문을 세우다’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어떤 집안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그 집안이 잘되는 이유는 신앙때문이다 . 여기 사용된 것은 ‘파수꾼’의 표상이다. 파수꾼은 ‘깨어’ 성을 지켜야 한다. “파수꾼”(1절)은 시편 121:3~5에서 세 번이나 언급된 ‘지키시는 자’와 같은 말이다. 하나님께서 한 성의 파수꾼이 되시지 않는다면 인간적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다.

1절에서는 “만약 여호와께서…하시지 않는다면”이라고 시작하였다면 2절에서는 ‘헛되다’라는 단어가 문두에 나와 강조되고 있다. 2절에서도 1절의 “만약 여호와께서…하시지 않는다면”이라고 시작하였다면, 여기서는 ‘헛되다’라는 단어가 문두에 나와 강조되고 있다. 2절에서도 1절의 ‘만약 여호와께서…하시지 않는다면’이라는 표현이 생략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2절은 전제절을 생략하고 귀결절만 제시하고 있다. 이 부분의 사고가 신학적으로 정당한지 의심하는 이들은 여러 방법으로 달리 생각하기도 한다. 예컨대 ‘너희가 아침 일찍 일어나고 늦게까지 앉으며 너희가 먹는 빵을 위해 수고해도 허사다. 그분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위해 그들이 잠잘 때도 그만큼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라는 해석이 한 예다.

2. 제2연(3~5절)

이 시에서는 성문 곧 재판정에서 연로한 부모가 고아나 과부처럼 대우받지 않고, 장성한 자녀들의 조력을 받아 수치를 당하지 않는 점이 부각된다. 이 부분의 사고는 지혜 문헌의 사고치고는 약간 특이하다. 왜냐하면 선악의 개념이 아니라 자녀의 다소(多少)가 주제이기 때문이다.

“기업”(3절)은 여호와께 받아서 그 용도를 누리는 데 강조점이 있다. 땅이 기업이라면 그것의 용도는 곡물의 수확이다. 자식이 기업이라면 자식의 할 일은 부모를 지켜 원수를 제압하는 일이다. 적대적 세력이 횡행하여 가족 스스로 생명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고대에 이러한 사고는 필수적이었다. “젊은 자의 자식”(4절)들은 ‘젊어서 낳은 자식들’이라는 의미다. 이제 노인이 되어 힘이 부칠 때, 장성한 자식들은 수중의 화살들처럼 든든하기만 하다. 그리고 ‘장사’는 ‘용사’로 번역하면 좋을 것이다. 여기서 ‘장사의 수중의 화살들’과 ‘젊은 자의 자식들’을 비교할 수 있다.

5상절은 ‘자기 전통을 그것들로 가득채운 자는 복되도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의 전통을 가득 채우는 이’가 3절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이다. 그러나 여기 화살과 전통은 비교를 제시할 뿐, 구태여 그 전통을 하나님께서 채우신다고 가정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활은 고대에 최고 무기 중의 하나였다. 5상절에는 ‘전쟁’ 표상이 사용되었고, 이제 하절에서 ‘성문’에서 다투는 표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표상의 ‘일관성’을 견지하려면, 하절에서도 ‘전쟁’ 표상이어야 한다. ‘성문’은 원수의 집중공격 대상이 된다. 그렇지만 여기 사용된 표상은 성문 법정에서 재판 장면인 듯 보인다. 연로한 자가 기소를 당했다면 그 장성한 자녀들이 큰 힘이 되어 그가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도울 것이다. 사용된 동사들은 5상절에서는 3인칭 단수, 하절에서는 3인칭 복수형으로 나타난다.

설교를 위한 적용

자녀는 하나님이 세워주는 것이다(시 127:1). 자녀를 주시는 분도 가정을 세우시는 분도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통해 가정은 세워지는 것이다. 특히 자녀는 여호와의 주시는 기업으로 자녀를 위한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을 자라게 하고, 사람을 훌륭하게 만드는 일은 모든 것보다 우선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자녀를 잘 양육하는 것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중요한 임무요, 선물이다. 그래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귀중한 기업적인 사명이요, 일터다. 또한 자녀는 부모의 상급이다. 부모는 부모의 역할을 잘하는 대로, 수고한 대로 자녀를 통해 상을 받는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상급이요, 보상이다. 우리는 자녀를 위해 수고해야 한다. 수고하되 바로 해야 한다. 가정에서의 신앙의 교육이나 종교적 훈련은 인격과 도덕의 기초 그리고 사회를 바라보고 이웃과 평화와 화해를 만드는 인격의 바탕이 된다.

부모는 자녀의 생의 방향과 목표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잘 지도해 주어야 한다. 그러할 때에 자녀는 세상의 문화를 따라가지 않고, 이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가정을 공격해 오는 악한 세력이나 원수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시편 128편 주해와 적용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본문의 개요

시편 127편 마지막 절이 ‘복 되도다’로 시작했고 시편 128편 첫 절도 ‘복 되도다’로 시작한다.

앞의 시편에서는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라고 했고, “자기의 사랑하는 자에게는 ‘영예’를 주신다”고 했다면, 여기 시편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자기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며, 형통하리라”고 한다.

앞의 시편에서 자식들을 ‘기업’과 ‘상급’으로 언급했다면, 시편 128편에는 그 상급을 보다 확대시켜 제시하고 있다.

앞의 시편에서는 하나님을 제쳐두고 인간이 아무리 애쓰고 수고한들 허사라고 강조했다면, 여기서 시인은 ‘너는 기도하고 일하라, 그러면 수고한 대로 먹으리라!’고 지적한다.

이 시도 앞의 시처럼 ‘지혜시’로 분류된다. 지혜 문헌의 특징적 요소들 가운데 여기 시편에서 우리는 ‘복 되도다’라는 외침과 여호와를 경외함과 그의 도에 행함 등의 사고를 볼 수 있다.

본문 주해

1. 제1연(1~4절)

“그 도에 행하다”(1절)라는 말은 ‘그분의 길들에 걷는 자’라는 의미다. 그분의 말씀이 인생이 걸어야 할 정도(正道)다. 정도(正道)를 따라 걸어가는 자들이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며, 그런 자들의 발은 천사들이 지켜 주신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벗어나 높은 데서 뛰어 내릴 때에도 천사들로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으셨다.

1~2절에서 하나님 없이 스스로 수고하는 자의 헛수고와 대조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누릴 복이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네 손의 수고를 네가 ‘정녕’(키) 먹으리라”(2절)가 강조되고 있다.

여기 1~2절의 사고를 다른 말로 제시한다면 ‘네가 기도한대로 축복을 받으리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를 경외’를 ‘기도’로 대체한 것인데, 우리 수고의 결과는 기도에 좌우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실”(3절)이란 건물 뒤편 좁은 지역, 산악지대에서도 깊은 오지를 말한다. 여기서는 타인이 접근할 수 없는 가장 깊은 곳을 말한다.

아내는 오직 남편만이 접근 가능한 구역에 거한다. 그 아내는 많은 자녀들을 생육하는 주렁주렁 열매 맺는 포도나무에 비교 되었다. 불임의 여인을 저주받은 자로 여겼던 시대에 다산은 축복이었다. 자식들은 감람나무 ‘가지들’에 비교되었다. 이 가지에 미래가 달려 있다. 줄기는 부모라면, 그 가지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기 때문이다.

감람나무의 특징은 더디 자라면서도 수명이 천년 이상 된다고 한다. 또한 나무를 자르면 그 남은 몸통에서 주변에 새싹 가지들을 쫙 내므로 감람나무를 제거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감람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적어도 7년은 기다려야 하고, 장성하려면 15년 이상이 걸린다. 다 자란 나무는 1년에 열매를 0.5톤 정도 산출하는데 그 열매에서 짠 기름은 요리하는 데, 불을 밝히는 데, 가죽을 부드럽게 만들 때 등 다방면으로 유용했다. 나무는 재목으로, 장식용으로, 가정용 도구들로 사용되고, 나무껍질은 상처에 바르는 약으로, 수렴제(收斂劑 위나 창자에서 지혈·진통작용을 한다)로, 해열제로 사용되었다.

“이같이”(4절)란 앞에서 제시된 축복들을 가리킨다. 즉 음식이나 의복 등과 같은 경제적 필요가 풍성하게 충족되며, 사회적으로 존중받으며, 생명이 세대에서 세대로 지속되는 것 등이다. 이런 외적인 축복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약속되었다.

2. 제2연(5~6절)

이제 직설법으로의 진술이 아니라, 축복을 선포하는 형식이다. 축복이란 원래 예배의식에서 선포되며, 여기 선포되고 있는 축복은 시온에서 선포되는 것이다.

“시온에서”(5절)란 성전에서란 말과도 같아서, 이 축복이 제사장의 축복기도가 아닌가 한다. 모든 축복은 구약시대에 성전을 통해서 전달된다고 간주되었다.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형통과 번영을 평생에 보리라는 축복은 예루살렘 곧 시온산에 위치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대표되는 구약의 영적 구심점을 중심으로 언약백성이 완전한 조화를 이룰 때 이루어질 수 있는 축복이다.

구약시대에 자손들이 많다는 것이 축복의 상징이었다(6절).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문이나 하늘의 별과 같이 많으리라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서 보듯 하나님의 의도는 언약 백성이 수적으로 창대하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무자함이나 불임은 저주의 표지로 간주되기도 했다(참고 신 28:11, 18)

설교를 위한 적용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은 아무 걱정이나 수고 없이 편안히 살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약속하신다. 그들은 할 일이 있을 것이고, 건강할 것이며, 일을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질 것이고, 일용할 양식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거나 아무 능력 없는 가난한 자처럼 남들의 수고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이다.

조용히 일하며 자기 양식을 먹는 것은 우리의 도리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긍휼하심이다. 그들은 하는 일마다 성공을 거두어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얻는 것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들은 가족관계에서 풍성한 위로와 낙을 얻게 될 것이다. 아내와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 본연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면, 그들은 그 어떤 피조물이 주는 위로보다 남자에게 더 큰 기쁨이 된다.

아내는 집 담장에 있는 결실한 포도나무와 같으니, 그 가지를 여기저기로 뻗어서 장식용으로 좋은 포도나무 일뿐만 아니라, 그 열매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결실한 포도나무다. 포도나무는 약하고 망가지기 쉬운 식물이어서 잘 지지해 주고 돌보아 주어야 하지만 매우 유용한 식물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포도나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정에 아내의 일이 있고, 그곳은 아내의 성채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장막에 있나이다.’

아내의 자리는 집 담장으로서, 아내는 남편의 발아래에 있어서 짓밟혀서도 안 되고 지붕에 있어서 남편을 좌지우지해서도 안 될 것이다.

아내는 집 담장에 붙어있는 포도나무 같이 사랑스러운 아내가 될 것이고, 유순하게 뻗어가는 포도나무 같이 순종적인 아내가 될 것이다.

아내는 자녀들만이 아니라 지혜와 의와 선한 관리의 열매들에 있어서도 포도나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고, 그 포도나무의 가지는 담을 넘어서 좋은 열매를 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을 것이다.

자녀들은 본래 돌감람나무지만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어서 그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어린 감람나무 같을 것이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한 상에 함께 둘러앉아서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누는 것, 자녀들이 음식을 잘 먹어서 약이 필요 없을 정도로 건강한 것, 자녀들이 곧게 뻗은 푸르고 어린 감람나무 같아서 부모의 선한 교육으로 인한 수액을 잘 흡수해서 때가 되면 훌륭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을 바라고 기뻐한다.

시편 107편 주해와 적용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라

이 성 훈 남부성결교회 담임 목사

본문의 개요

시편 107편은 시편의 문맥상 제 5권의 시작을 구성하고 있다. 이 시편의 ‘헤세드’(인자)는 시편 5권에서 핵심용어로 대두된다(107:1, 8, 15, 21, 31, 43). 104~107편은 주제에 있어서 일련의 관련성이 있는데 시편 104편은 창조를, 시편 105편은 족장들 시대에서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 정복 등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기사를 언급하며, 시편 106편은 애굽, 광야, 약속의 땅에서의 사사시대 생활에 이르는 이스라엘 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어서 시편 107편은 포로 이후 회복에 관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

특히 시편 106편과 107편은 주제에 관한 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시편 106편은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과, 다시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되리라는 점을 언급한다. 한편, 107편에서는 사방에서 흩어진 자들을 하나님께서 모으신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시편 106편과 107편이 서로 유기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본문 주해

1. 제1연: 서론(1~3절)

전체 서론 역할을 하고 있으며, 1연은 결론적 진술이라고 할 수 있는 43절과 함께 이 시를 둘러싸고 있다.

4~32절은 구체적 사건들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33~42절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묘사다.

2. 제2연: 광야에서 체험한 구원(4~9절)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랑한 것을 묘사하고 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통해 광야에서 길 잃을 염려를 할 필요는 없었다. 제2연에서의 “광야”(4~9절), “흑암”(10~16절), “질병”(17~22절), “바다”(23~32절) 등에 관한 언급은 인간이 처한 극한 상황을 묘사한다.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했다’(4절)는 것은 사람 사는 성읍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사막에서 방황하며 사람 사는 성읍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짖고 회개할 때, 하나님은 저들을 “바른 길”(7절)로 인도하셔서 사람 사는 성읍에 이르게 하셨다.

모든 인생들은 ‘그분의 인자’와 ‘그분의 기이한 일들’(8절)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데, 광야에서 방황하던 자들에게 하나님의 인자는 ‘길을 보이사 그 길을 걷게 하신 일’을 가리킨다.

3. 제3연: 흑암에서의 하나님의 선하심 체험(10~16절)

제2연에서 ‘광야에서의 구원’ 체험에 이어, 3연의 무대는 ‘흑암’(10절)으로 바뀌었다. 제3연에서 언급된 사람들은 쇠고랑을 차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앉아 한숨짓는 자들로서, 삼손이나 여호야긴 왕과 같이 깊은 좌절의 수렁에 빠진 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말씀을 거역하고 그분의 뜻을 멸시하는 행위를 일삼으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 행위를 하는 이들이다.

3연에서 언급하는 문제를 통해 결국 인생의 문제라는 것은 무대만 약간 바뀔 뿐, 근본 문제는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 역시 회개하고 부르짖는 방법뿐이다. 우상숭배의 죄와 더불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켰던 므낫세 같은 왕도 앗시리아군에 사로잡혀 쇠사슬에 결박당하여 바벨론에 끌려간 후 환란 중에 여호와께 간구하고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기도할 때, 그를 다시 왕위에 앉히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흑암에서 이끌어 내셨다.

이와 같이 인생의 문제는 여러 종류지만, 인생의 문제에 대한 권면은 동일하다. 2연에서 광야에서 길을 잃고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향한 배부름과 해갈의 은혜로 인하여 찬양하였다면, 3연에서는 놋 문을 깨뜨리시고 쇠 빗장을 부수고 해방시키시는 하나님께 찬양하고 있다.

4. 제4연: 질병에서의 하나님 선하심 체험(17~22절)

광야나 흑암에서의 고통보다는 질병 같은 것으로 인한 고통이 보다 보편적인 현상일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질병의 질고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하심으로 질병에서 회복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한다.

5. 제5연: 바다 광풍에서의 구원 체험(23~32절)

5연에서는 해상 무역인들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는데, “큰물”(23절)은 바다며, 큰물에서 “영업하는 자들”(23절)은 해상 무역인들을 가리킨다. 바다의 파도를 일으키거나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였다. 광풍에 휩싸인 선원들의 모습은 술 취한 자가 비틀거리며, 두려움에 떨고, 정신이 나간 자를 방불케 한다. 이때 하나님의 구원은 광풍을 잠잠케 하고 파도를 잔잔케 하시는 일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이는 광풍과 파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 준다.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32절)하는 일은 공적으로 그분의 행하신 일을 증거하고 간증하는 것을 가리킨다.

6. 제6연: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를 노래함(33~42절)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만 아니라, 죄악에 대한 처벌을 동시에 묘사한다. 이 연에서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경우에는 동사의 시제를 현재로 번역한다. “샘”(33절)은 물이 솟구쳐 나오는 곳, 즉 물의 근원을 가리킨다. “마른 땅”(33절)은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중 반석에 물이 강같이 흐르도록 하신 지역을 말하는데, 이는 번창하던 사람들을 졸지에 거름더미에 앉히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을 암시한다. 열매 맺는 땅, 즉 “옥토”(34절)가 소금기 있는 땅(불모의 땅)으로 변화하는 것은 그곳 거민들의 죄악 때문이다.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인류는 계속 이런 심판을 받아 왔다. 제6연에서는 메시아 시대에 도래할 구원의 축복에 견줄만한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한다. ‘광야 사막에서 방황하며, 사람 사는 성읍에 이르는 길을 찾아 주지 못해,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모습이다. 구원받은 자들이 자신들이 거할 성을 건축하고, 그곳에 파종하며 재배하여 수확하고, 크게 번성한다. 이는 광야 방랑생활을 거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축복받는 삶을 반영한다. 그러나 언약 백성의 불순종은 ‘압제, 재앙, 슬픔’ 그리고 압제자 앞에 굴복당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인생의 성패와 흥망성쇠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다.

7. 결론적 진술(43절)

이상에 진술된 바에서 인생의 문제가 무엇이며,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 제시되었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를 깨닫고 축복된 삶을 살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섭리, 곧 악인에 대한 처벌과 의인의 구원사건을 주목하고, 언약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우치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전히 확신하고 그것을 경험적으로 알며 큰 감화를 받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의 목전에 있게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큰 유익이 된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적절히 살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 일들을 마음에 쌓아놓고 숙고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주의 깊게 살피는 일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하는 매우 중요한 단계다.

2. 소망을 가지라

의인들은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다루듯이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다루어 그들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을 보는 것, 멸시받던 자가 높아지고 불경건하고 교만한 자가 진토에까지 낮아지는 것을 보는 것은 큰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구원의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암담하게 보여도 우리들에게는 소망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이 다시 오시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는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이유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라. 수많은 이방인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한 민족이다. 430년 동안 애굽에 의해 어려움을 당했으며, 바벨론에 의해 어려움을 당했다. 또한 블레셋, 미디안, 암몬, 모압, 앗수르 등의 외세에 의해서도 수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러한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구원함을 받고 구속함을 받았다.

3절에서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 모으셨다’라고 했는데, 이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하나님의 구속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다는 것을 언급한다.

‘대적의 손에서 구속하셨다.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았다’는 말을 단순한 정치적인 자유나 해방만으로만 한정지을 필요는 없다. 이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죄의 종살이를 하던 우리들을 은혜와 사랑으로 죄 사함을 베풀어 주셔서 죄로부터 자유를 주셨다. 이는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시편 108편 주해와 적용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본문의 개요

시편 108편은 다른 두 시들의 후반부를 합쳐 놓은 시다. 1~5절은 시편 57:8~12에 해당되고, 6~13절은 시편 60:7~14에 해당된다. 1~3절에서 찬양하리라고 서원하는데, 그 이유는 4절에서 언급하듯이 그분의 언약 사랑 때문이다. 5절에서 다시 찬양을 드리고, 6절에서는 구원하여 주실 것을 간구한다. 이어 7~9절에서는 신탁이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10~12절에서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마지막으로 13절에서는 믿음의 자신감을 표출한다.

이렇게 두 시의 일부가 하나로 합쳐져서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는 서원과 그 이유, 그리고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하나님의 약속 메시지, 도우심을 호소하는 기도, 믿음의 자신감 표출 등의 조합이지만, 결국 본 시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공동체 탄식시로 간주할 수 있다.

본문 주해

1. 제1연(1~5절): 찬양하리라

시인이 찬양하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강조 표명하는데 심지어 새벽을 깨우겠으며, 새벽에 일어나 찬양함으로 새벽을 깨우겠다고 다짐한다. 그분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큰지 하늘보다 더 높고, 그분의 신실하심은 궁창에까지 미친다. 공간적으로 그분의 인자와 신실하심의 크기를 묘사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분의 위대하심과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나타나기를 노래한다. 이런 공간적 묘사와 비견되는 것이 시간적 묘사로, 그분의 인자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른다는 진술이 이어진다.

2. 제2연(6절): 구원하소서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고 있다. 물론 시인이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여 달라고 하는지는 논쟁의 대상이지만, 대체적으로 질병이나 원수에 대하여 승리하게 해달라는 점이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이와 같은 간구는 탄원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3. 제3연(7~9절): 하나님의 권능과 그의 약속

시인은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께 드린 간구를 다시 상기하는데, 이를 통하여 시인은 자신이 흔들림 없이 기도하도록 스스로를 다짐한다. 하나님은 세겜과 숙곳을 친히 정복하여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시겠다고 하셨다. 세겜과 숙곳은 각기 족장들의 발자취가 남은 곳으로, 세겜은 요셉의 유골이 안치되었으며, 시므온과 레위가 누이동생 디나의 강간을 위하여 무자비한 보복을 감행했던 곳으로 에브라임 영지로 할당되었다.

세겜 북쪽으로는 에발산이, 그리고 남쪽으로는 그리심산이 위치하며, 로마 황제가 그리심산 위에 섰던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파괴하고, 보다 더 북으로 올라간 지점에 ‘네아폴리스’라고 하는 새 도시를 건설했다.

숙곳은 야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고향으로 귀향할 때, 브누엘에서 이곳으로 이동하여 잠시 체류했던 곳으로, 후일에 갓 지파에 분배된다. “숙곳 골짜기”(7절)는 숙곳 지점의 요단강 분지를 지시하는 듯하다.

‘길르앗’과 ‘므낫세’를 언급하는 것은 요단 동편 지역도 이스라엘의 기업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듯 하며, 에브라임, 유다 등은 각기 이스라엘의 지리적 중심지와 정치적 중심지를 암시해 준다.

하나님은 더 나아가 모압, 에돔, 블레셋 등과 같은 주변국들까지 자신의 속국임을 분명히 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리하는 지상 대리자로서 이러한 주변국들을 지배해야 했다. 이는 신약적으로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인 주권과 통치를 예고한다.

4. 제4연(10~12절): 긍휼을 베푸소서

시인의 간구가 반복되는데, 제 4연에서는 영토의 회복을 위해 간구한다.

에돔은 에서의 후예들이 거하는 나라로, 이스라엘과는 관계가 좋지 않은 국가였다. 다시 이스라엘을 침범함으로 재기를 노리는 에돔을 겨냥하여 시인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통한 승리를 간구한다.

5. 제5연(13절): 믿음의 확신

전쟁에서의 필수 사항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직접 대적을 짓밟으실 것을 기대하며 전쟁에 임하여 용맹스럽게 행할 것이라는 결심을 표명한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토 문제로 이웃과 다툴 때 옛 하나님의 양속을 상기하며 주변을 점유하고자 노력한 정황을 고려한다면, 이를 단순히 영토에 관한 이야기로만 한정할 수 없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 나아갈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는데,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는 말씀을 반향하고 있다.

이 시편이 구약시대의 가나안 주변국들에 시야를 돌리고 있다면, 이는 우리 역시 온 세상에 눈길을 돌려야 하는 신학적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온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해야 할 사명을 가진 영적 군사다.

세상의 더럽고 추악한 문화와 영적 순결을 잃은 이 세대에 맞서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좆아 교회를 순결하게 하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라

기도할 때 하나님의 권능과 약속에 대한 믿음을 확신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그의 성소에서 그의 거룩하심을 두고서 맹세하신 말씀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과 행하시는 것이 별개가 아니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약속으로 인하여 위로를 얻어야 한다.

3. 오직 하나님만이 도움이다

우리는 피조물을 의지하고자 하는 모든 유혹을 떨쳐 버리고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을 감당해야 하지만,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뿐이다(빌 4:13). 이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해냈거나 어떤 것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과 관련해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는 이유가 된다.

시편 109편 주해와 적용

고통 속에서의 간구

본문의 개요

시편 109편과 110편은 관련성이 있는데, 그것은 시편 109편이 압제 당하는 이의 외침이고, 시편 110편이 곤고한 중에 처한 왕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두 시편은 유기적인 관계성을 가진다. ‘오른편에’(6절)라고 하는 표현은 시편 109편과 110편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고리다.

이 시에는 교차대구법(2~3, 14, 16절), 일석이조 수식어들(14, 20절), 은유들의 일치(2~3, 13~14절), 수미쌍관(1절과 30절, 7절과 31절, 21절과 26절, 22절과 30절, 26과 31절) 등의 기교를 사용함으로써 시의 통일성을 보여 준다.

이 시의 사고의 흐름을 보면 1절이 간구라고 할 때에, 2~5절은 그 이유를 묘사한다. 시인은 자신이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원수들이 자신을 고소하는 것에 대한 고통을 토로하고 있다. 6~20절에서 시인은 원수를 향해 저주하며, 21~29절에서 원수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한다. 마지막으로 30~31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며 찬양할 것을 서원한다.

본문 주해

1. 제1연(1~5절): 탄원의 이유

시인을 무고하게 비방하고 있는 원수들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개입을 간절하게 요청한다. 무고하게 기소 당했음을 보여 주는 시인의 모습은 하나님을 대표하여 재판하는 제사장 앞에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2. 제2연(6~19절): 탄원의 내용

탄원자는 원수를 향하여 저주를 쏟아 붓고 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우편에 서서 자신의 생명을 악한 자에게서 구해 주시길 확신한다. 그는 그들을 저주함과 동시에 그 후손들에게까지 그 저주가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다. 시인의 원수는 저주를 옷같이 입었고, 물같이 저주를 마셨으며, 그 저주가 그의 속속들이 뼈 속까지 침투하게 되었다. 원수의 띠가(19절) 불의한 재판관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때, 시인의 원수는 불의한 재판관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시인은 자신을 기소하는 자들과 그를 악담하는 자들에 대한 보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3. 제3연(21~25절): 탄원자의 고독

시인은 현재 자신이 어떤 고통 가운데 있는가를 묘사한다. 이는 자신의 무기력한 정황을 묘사함으로써 기도에 응답하셔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 시인의 현재 상황은 가난하고 마음이 상한 상태다. “석양 그림자”(23절)란 ‘길게 뻗친 그림자’란 의미로서, 석양 그림자가 사라짐같이 자신도 그렇게 사라지리라는 슬픔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그는 메뚜기처럼 내침을 받았다. 금식은 시인이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취한 조처였다. 시인은 무릎이 약해졌으며, 그의 몸은 기름기가 없이 수척해졌다.

4. 제4연(26~29): 탄원자의 구원에 대한 간구

시인은 다시 구원을 간구하는데, 구원을 간구할 수 있는 근거는 백성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에 대한 언약적 사랑,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다. 비록 원수는 시인을 저주한다고 하여도 하나님만큼은 시인을 축복해 주실 것이라 신뢰에 근거하여 그는 하나님께 자신이 현재에 처한 상황에서의 구원을 간구한다.

5. 제5연(30~31절): 탄원자의 찬양

이제 구원의 확신과 찬양하리라는 서원이 제시되고 있는데, 기도와 간구 이후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것을 확신한 시인의 확신이 넘치는 승리의 기도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재판하시는 자에게 변호하실 것을 확신한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근거 없는 비방에 담대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해하고자 하든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사람의 저주는 전혀 이루어질 수 없으며, 부당하게 저주하는 자들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기대할 수 없다. 반면에 의인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얻을 수 있다(28절). 이는 악인들의 계략은 반드시 좌절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세상 근심과 걱정으로 지치고 힘겨워 한다. 악한 세력들이 가져다주는 불안, 마음의 부담, 두려움 등이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께 우리의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근거 없는 비방에 치여 중심을 잃고 흔들리기보다, 오직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킴으로써 축복과 자유의 삶을 누려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고대하라

신앙의 가치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발견된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대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향하여 시선을 고정하는 것 같이 우리도 오직 그분의 임재의 놀라운 영광을 체험할 날을 고대해야 한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온전히 아시는 것 같이, 우리 또한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될 날을 고대해야 한다. 하나님은 영적인 감정을 고무시킬 목적으로 고안된 종교적 상징물들을 채집해 놓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삶을 보장하거나

인간성을 고취시키기 위한 종교적 성상이 절대 아니다. 영적인 상징은 더더욱 아니다. 그분은 인격의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체험해야 할 분이다.

시편 110편 주해와 적용

온 세상에 확장되는 메시아 왕권

본문의 개요

이 시가 생겨난 배경에 대해서는 예배 의식용으로 작시되었다는 의견과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을 들어 시의 배경을 이해하려는 입장, 또 이 시에서 언급된 왕이 다시 오실 메시아를 예언한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 시를 다시 오실 메시아라고 이해하고자 한다면 구약 자체의 문맥에서 그 본래의 의미를 해석해야 하는 숙제가 있지만, 이 시에서 언급하는 왕의 제사장직은 구약 내에서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신약의 증언을 의지하여 이 시를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 시의 구조는 간단하지 않으나, 하나님의 예언 말씀을 기준으로 1~3절, 그리고 4~7절로 나누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본문 주해

1. 제1연 (1~3절): 메시아의 통치

이 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메시아를 통해 성취될 것을 바라보는 메시아 예언시다. 시인은 다윗 자신으로 오실 메시아를 ‘내 주’라고 호칭하고 있다. 그렇지만 오실 메시아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여느 왕의 모습처럼 묘사되고 있다. 선지자들은 자기 당대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을 그렸던 것이다. 메시아의 오심의 성취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 예언시가 얼마나 정확하고 멋지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는가를 보며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약에서는 보이는 주변 이방국가들이 원수였다면,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는 보이지 않는 정사와 권세, 어둠의 세상 주관자 곧 악령들이 메시아 통치를 대적하는 세력이다.

“우편”(1절)은 통상적으로 영예롭고 우선적 지위를 의미한다. 여호와께서는 메시아 우편에 계시어 그를 도우신다. “발등상”(1절)의 경우 애굽에서나 앗수르에서도 왕의 비품으로 사용되었는데, 정복된 원수를 상징적으로 지칭한다. 한편 신약에서는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메시아 왕으로 등극하심으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시온으로부터 메시아 왕권이 온 세상에 확장되도록 일하신다. ‘당신의 권능의 홀’(2절)은 메시아 왕권의 상징이다. 왕권의 상징인 거룩한 옷을 입은 주의 백성에게는 새벽의 태가 낳은 듯한 젊음의 “이슬”(3절)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이슬은 비와 함께 생육의 원천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된다.

2. 제2연(4~7절): 메시아의 승전의 날

제1연의 사고가 보다 진전되고 있다. 1연에서 메시아의 통치와 전쟁의 날이 언급되었다면, 2연에서는 열왕을 쳐서 파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4절에서 언급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좆는 영원한 제사장직에 대한 언급은 이 시가 메시아 예언시임을 보여 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메시아의 제사장 직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흠 없는 제물로 바치신 십자가 사건에서 절정에 이르렀고, 그 이후로 메시아 왕으로 등극하시어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심으로 그 직무는 수행되고 있다(롬 8:34). 따라서 하나님이 왕이시라면, 그에게 속한 우리는 ‘왕’이며 그분이 대제사장이시라면 우리 역시 제사장인 것이다.

메시아는 분명 그의 나라에 대한 모든 반대를 무력화시키실 것이고, 끈질기게 반역하는 모든 자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세상의 군왕들과 고위 관원들이 그들의 목적을 관철시키는 데 익숙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메시아를 대적하여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고, 도리어 그 시도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는 메시아에 관한 최초의 약속, 즉 그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깨어 있어라

주 예수께서는 분명히 그의 나라에 대한 모든 반대를 무력화시키실 것이고, 반역하는 모든 자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에게 가까이 계셔서 그들을 도와 즉시 힘을 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와 그들의 원수들을 치기 위하여 나타나실 것이다. 그의 노하시는 날, 즉 원수들의 죄의 분량이 가득 차서 그들이 멸망할 날이 무르익어 주께서 진노하시기로 정해진 때, 주의 인내의 날이 끝이 나서 진노의 날이 임할 것이다. 현재는 도저히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더라도, 그리스도께서 특정한 원수들을 멸망시키실 때가 정해져 있고, 그때가 되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의 진노의 큰 날은 종말의 때 있을 것이다(계 6:17).

2. 승리를 확신하라

승리는 아주 높은 자들에게까지 미치게 될 것이다. 주께서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며 아무리 큰 자들이라고 해도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은 그 앞에서 엎드러지게 될 것이다. 이 승리는 아주 멀리까지 미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모든 원수들의 철저하고도 완전한 파멸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는 그들을 철저하게 쳐부수어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실 것이다. 이는 메시아에 관한 최초의 약속, 즉 그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창 3:15)과도 연관성을 가진다.

3. 낮아짐을 배우라

메시아는 이기신 자로서, 이는 그가 ‘높아지신 것’(exaltation)이라기보다는 그가 승리를 대단히 ‘기뻐하신 것’(exultation)을 의미한다(골 2:15),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신 것은 그가 낮아지신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다. 우리 역시 그와 함께 고난을 당하면 또한 그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될 것이다.

시편 111편 주해와 적용

거룩하고 지존하신 이름

본문의 개요

시편 111편은 112편, 113편과 함께 ‘할렐루야’ 삼부작을 이룬다. 시편 111편이 정직한 자들 회 가운데서 여호와의 영광, 권능, 인자하심을 송축한다면, 시편 112편은 거기서 흘러나오는 영광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 정직한 자들의 행실과 성품과 축복을 노래한다.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두 시편은 매우 유사하다. 둘 다 알파벳 시며, 이전 시들로부터 차용한 부분들로 구성되었다.

시편 111편과 112편에서 각기 1절은 시의 주제를 제시한다면, 그 다음 구절들은 주제를 세세하게 전개시킨다.

시편 113편도 ‘할렐루야’로 시작하며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외친다.

이 시의 현저한 특징은 알파벳 시라는 점이다. 알파벳은 한 절씩 배치되지 않고, 한 절에 두 개씩 배치되고, 9~10절에만 세 개씩 배치되어 모두 22개를 갖추었다.

구조를 살펴보면, 1절에서 찬양하리라는 결심을 표명한다면, 2~10절에서는 그 찬양의 선포 곧 그 찬양의 내용이 제시된다. 10절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지혜 문헌적 사고를 표명하고 있다.

2~10절 부분을 사고상으로 다시 구분하자면, 2~7상절은 여호와의 구원행위들을 노래하고, 7하~10절은 여호와의 언약 규례들을 노래한다.

본문 주해

1. 제1연(1절): 찬양 결심

여기에서 발표된 시인의 의도, 곧 그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내용이 2절 이하에서 제시되고 있다.

2. 제2연(2~7상절): 여호와의 ‘행사’를 찬양하다

언약 백성에게 출애굽의 구속을 위한 기사들이 있었다면, 새 언약의 백성에게는 십자가, 부활, 승천, 등극의 큰일들이 있다. 언약백성이 출애굽의 기사를 늘 선포하고 노래했다면, 신약백성도 마땅히 십자가 구원을 늘 노래하고 선포할 것이다.

“여호와의 행사”(2절)란 그분이 행하신 일들이며 “그의 의”(3절)란 그분의 구원하시는 의로운 일을 지시한다. 그분이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하신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이스라엘이 압제 하에 신음할 때,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기억하심에서나 광야에서 거듭 반역하고 불평할 때도 오래 참으심으로 저들을 용납하심으로써 나타났다.

“양식”(5절)은 원래 맹수 혹은 육식조의 먹이를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공급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과 언약 맺은 백성을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언약 백성은 그분을 배반할지라도 그분은 자신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행사의 능력”(6절)이란 그분의 능하신 행사들이다. 즉 구약백성들이 노래할 하나님의 행사는 출애굽에서 나타난 기사들만 아니라, 그 이후 광야 방랑시에 행하신 기이한 일들이나 가나안 정복에서 행하신 기사들까지 총망라한다.

그의 “손”(7절)은 그분이 일을 행하시는 수단을 표현하는 의인법이다. 이런 고백이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고, 불평과 야속한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미성숙한 모습이거나 병든 모습일 것이다.

참 신앙이란 그분의 섭리와 인도에 순응하여 마음에 감사가 우러나오는 상태를 가리킨다.

3. 제3연(7하~10절): 여호와의 언약을 찬양하다

구약 성도들의 삶의 규범은 시내산언약과 그 갱신인 모압언약이었다. “법도”(7절)는 언약조항들을 지시하는데, 언약, 규례, 율법, 교훈,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증거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이스라엘에게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엄위’하신데, “이름”(9절)은 그분 자신을 가리킴과 동시에 그분의 ‘속성’을 가리킨다. 애굽에서, 홍해에서, 시내산에서, 광야에서, 가나안에서 행하신 크신 일들로 인하여 그분의 속성은 거룩하시고, 위엄 있으시다는 사실이 온 세상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난다.

“그 계명을 지키는 자”(10절)에서 ‘그것들’은 ‘그것(여호와를 경외함)을 행하는 자에게 좋은 통찰력이 있다’로 보는 것이 옳은 해석일 듯하다.

즉 시인이 노래하는 목적은 정직한 자들의 모인 회중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과 함께 그분이 주신 언약 조항들을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베푸신 일 속에서 그의 전능하심을 보여 주는 증거들을 무수히 행하셨고, 그에게 불가능한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 주셨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들은 둘 다 견고하여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장차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실 큰일들이 확실하게 이루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결코 취소되거나 무효화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 일들을 무효화시키지 않으실 것이고, 사람들과 마귀들은 그 일들을 무효화시킬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진실과 정의로 행하시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언행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리석고 거짓되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거나 행하는 모든 일에 정함이 없지만,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와 진리 속에서 말씀하시고 행하시기 때문에 취소나 폐기는 영원히 배제된다.

2.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이름을 경외하여야 하고, 거룩한 경외심으로 그 이름을 생각하고 말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의 본분임과 동시에 그의 말씀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도리에 맞고 합당하며 우리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말하고 행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지혜의 머리, 즉 지혜의 시작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지혜로워지기 시작한다. 모든 참된 지혜는 참된 신앙에서 생겨나고, 참된 신앙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모두 형통할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향하여 진군하는 여호수아에게도 율법을 따라 행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고 약속하셨다(수 1:8).

진정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복으로 가는 너무도 좋은 길을 인간에게 주신 것에 대하여 영원히 하나님을 찬송하여야 할 것이다.

시편 112편 주해와 적용

믿음으로 말미암은 견고한 믿음

본문의 개요

시편 112편은 시편 111편과 같이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알파벳 시다. 내용적으로 볼 때 시편 112편은 111편을 보충한다. 시편 111편이 하나님의 행하신 위대한 일들과 언약을 노래한다면, 시편 112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인격과 일들의 위대함을 노래한다.

이 시는 지혜의 내용을 담고 있다. 야웨를 경외함, 율법을 존중함, 의인과 악인의 대조, 보응의 불가피성과 일상 삶에서의 자세에 대한 조언 등과 같은 주제가 지혜시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외형적으로 부각되는 이 시의 특징은 시편 111편과 동일하게 알파벳 시로써, 한 절이 두 알파벳 글자를 포함하고, 마지막 9, 10절에서는 각기 세 알파벳 글자를 포함한다. 그리고 이 시는 1, 2, 3, 5, 6, 7, 8, 10절에서 병행구조를 보이고 있다.

내용상으로는 1~4절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임하고, 그런 자의 성품은 의와 은혜, 그리고 긍휼로 특징지어진다.

5~9절에서 그의 성품이 실제 현장에서 드러나며, 또한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한다. 그의 성품은 견고히 세워졌으며, 따라서 그는 축복받는 자다. 그 결과 이 시의 결론부인 10절에서 여호와를 경외치 않는 자들은 완전히 좌절하고 넘어질 것이라 노래한다.

본문 주해

1. 제1연(1~4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임하는 축복

“후손”과 “후대”(2절)가 서로 병행되는 짝으로서, 이들이 복이 있으리라는 말과 같다. “의”(3절) 개념은 공의 개념으로서, 이 용어는 때로는 ‘구원’ ‘평안’ ‘인자’와 병행어로 나타난다. “흑암”(4절)은 죄악과 실패와 저주를 의미하며, 흑암 가운데 일어나는 빛은 하나님 자신이시기에, 이 빛은 구원과 소망과 생명의 상징이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그 신적 성품을 상실했다. 그러나 구원을 통해 이 속성은 회복되는데, 따라서 우리가 신적 성품에 참여한다고 할 때, 이는 이웃을 향한 우리의 은혜로운 자세에서 나타나야 한다. 그런 성품은 오랜 연단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응할 때 형성될 것이다. 고난 없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는 불가하다.

2. 제2연(5~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의 성품과 삶

복된 자의 성품의 경우, 천부적으로 타고 나는 자는 매우 드물다. 구원 받은 이후에 성화의 긴 여정을 통해 다듬어지고 부서질 때 진주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요동하다’(6절)란 산들이 흔들리듯 요동치는 모습이지만, 위태위태한 불안정한 의미가 담겨 있다. 6하절에서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라’고 하는데, 자기 생명을 던져 타인을 구한 사람들은 세인의 기억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흉한 소식”(7절)은 기쁜 소식, 아름다운 소식과 대조된다. 경건한 자라고 해서 고난이 없지 않다. 많은 고난이 있지만, 그것들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이기며 나가는 길 뿐이다. 성도의 대적은 때로 그를 두렵게 하거나 실제로 그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하지만, 성도는 그런 것에 굴할 수 없다.

“흩다”(9절)는 ‘뿌리다’란 말이지만, ‘아낌없이 주다’란 의미로 보아야 한다. 정직한 자는 빈궁한 자에게 자기 재물을 뿌리듯 아낌없이 베푼다. 그것이 ‘의’다. “그의 뿔”(9절)이란 권세나 힘을 지시한다.

3. 제3연(10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의 종국

베풀기 좋아하는 삶의 모습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의 모습이다.

그들이 의인이라면, 이에 대조되는 ‘악인’은 의인의 형통을 보고 화가 나서 이를 간다고 했다. 하지만 악인은 낙담하고 그들의 바람은 허사가 된다.

‘악인이 소멸된다’(10절)는 말은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모두 불행하다거나 아니면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신자들이 오히려 세상적으로는 형통하고 고난 없이 평안한 일생을 누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의 영원한 운명이 지옥임을 고려한다면 그 모든 현세적 부귀와 영화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 구절은 악인의 현세적 불행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지속적으로 베풀고 선을 쌓는 자의 형통에 악인의 시기와 그런 자들의 궁극적 몰락을 지적하고 있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견고하리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는 것은 선한 자의 복이다.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세력들은 우리를 흔들어 놓으려고 애쓰지만, 비록 잠시 흔들린다고 하여도 우리는 곧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견고히 서 있게 될 것이다. 의인의 평판을 더럽히고 그에게 수치와 비방을 뒤집어씌우고자 온갖 짓을 하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의인의 결백은 밝혀지고 그의 이름은 그가 죽은 후에도 지속될 것이다. 사실이 아닌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크게 당황하기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이야말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굳게 정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의 닻을 내리고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여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진리 외에는 그 어디에서도 견고히 설 수 없고 만족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만 견고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견고한 마음을 지니게 된 자들은 그들이 목적을 이룰 때까지 인내로 기다린다.

반면에 악인은 의인이 형통하고 존귀하게 되는 것을 보고 한탄하게 될 것이다. 성도들이 잘 되면 악인들은 그것을 시기하게 되고, 시기는 그들의 뼈를 썩게 만든다. 악인들의 욕망은 전적으로 세상과 육체에 대한 것들로써, 이런 것들이 사라질 때, 그들의 기쁨도 사라지고, 그런 것들에 대한 기대도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한 낭패를 당하게 된다.

2. 여호와를 경외하는 가정이 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말씀 중심의 가정이 될 때 진정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 이러한 가정은 후손이 강성해지는 축복을 받게 된다. 이러한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당대뿐만 아니라 후손대대로 미치게 된다. 설령 당대에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일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의 풍성하신 자비에 따라 그들에게 가장 유익한 방법으로 복 주심을 신뢰하라. 악한 자들은 세상에서 헛된 권세를 누리는 것을 최고의 복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비록 빈궁하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며 훗날 영광을 나타낼 만한 이들로 사용 받을 것이다.

시편 113편 주해와 적용

인간을 위해 낮아지신 주님

본문의 개요

초막절, 하누카(=수전절), 유월절의 첫 날, 오순절 등의 절기에 회당에서 시편 113~118편이 모두 낭송되었다고 전해진다.

시편 113편은 시편 112편과 여러 면에서 연결된다. 시편 112편이나 113편을 보면 모두 경건한 자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풍성하게 공급하시며, 저들을 건지시며 영예를 안겨 주신다. 여호와는 자기를 신뢰하고, 경외하는 자들만 보호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후손들까지 축복하신다.

본 시편의 1~3절은 찬양의 권고, 4~9절은 찬양의 내용이다.

본문 주해

1. 제1연(1~3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호와의 종”(1절)은 예배하는 모든 경건한 자들을 지칭한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2절)란 표현과 “해 돋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라”고 하는 말은 시간적으로 영원히 찬양해야 함을 의미한다.

2. 제2연(4~6절): 높이 계신 하나님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보다 위대하시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다. 그리고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그분은 홀로 하나님이시며,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분이다. 높은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은 그가 온 우주의 통치자이심을 의미한다. 높이 계신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고 인간 세계를 살피고 섭리하신다.

3. 제3연(7~9절):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높이 들린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인생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거름 무더기”(7절)란 매우 천박하고 비천한 자리, 수치스러운 치욕을 지시하는 표상이다. 이전에 반역자의 집은 ‘거름더미’를 만들어 버렸다. 바알 신전을 헐어서 거름 더미가 되게 한 것 같은 방식이다.

욥은 몰락하고 병들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다. 고대에 무서운 병에 걸린 자는 아무도 반기지 않고, 결국 거름더미에 누워 지나는 자들에게 구걸을 하거나 저녁이 되면 낮 동안 따뜻하게 데워진 그 거름 가운데 자신을 숨기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비천한 자리에 처한 자라도 매우 존귀한 자리로 들어 올리신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이 같은 비천한 처지에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시고, 열방의 일원으로 존귀한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분은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함께 앉게 하시며”(8절)는 왕의 보좌는 아닐지라도 그에 버금가는 존귀한 자리에 앉게 하신다는 것이다.

전에 우리는 죄와 허물 가운데 행하며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섬기던 자들이었지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입었고, 그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고 일으키어 하늘 보좌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히셨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 같은 제사장들로 은혜 가운데서 왕 노릇 하는 것이다. 방백들이 따로 있지 않고 우리 성도의 모습이 그렇게 존귀하다.

하나님은 낮고 천한 자, 약한 자, 무식한 자를 들어 세상의 배운 자, 존귀한 자, 가진 자,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없는 자들과 약한 자들에게 믿음의 부요함을 주시어 궁극적으로 존귀하게 만드신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신다’는 표상은 한 가정의 주부 곧 한 남편의 아내이긴 해도, 자녀가 없어 늘 가정에서의 위치가 불안하던 여인이 자녀를 낳음으로 지위가 확고해지는 모습이다.

국가적으로 말하자면, 무자하던 왕비가 늘 자리가 흔들리며 좌불안석이다가 왕자를 하나 잉태함으로 지위가 확고해지는 그런 표상이다.

설교를 위한 적용

1. 하나님을 찬양하라

우리는 믿음의 눈을 들어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아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 세상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미치고 있는지를 보고 그분을 찬송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 거하시면서도 스스로 낮추시고 천지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기에 자신의 존귀함의 원천으로서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고 자신의 은혜의 원천으로서 스스로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베푸신 선하심은 이 세상의 많은 것들 속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을 찬양하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기에 이는 성도의 적극적인 생활의 발로이기도 하다. 본문에서 언급하듯이 여호와의 종들은 찬양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2:9에서도 언급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영원토록 모든 세대가 해야 할 영광스러운 특권이다.

2.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셨다(7~8절). 하나님은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실 때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가장 비천한 것을 택하여 그 일에 사용하시며 저희들 스스로도 가장 비천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까지 이르게 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때때로 빈곤과 수치의 무거운 짐 아래서 오랫동안 신음해 온 사람의 뛰어난 경건과 인내에 보응하신다. 우리는 하늘의 지혜를 얻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의 응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이와 같은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높은 자가 낮아지게도 하시며 낮은 자가 높아지게도 하신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게도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름 무더기에서 높이 들어 방백들과 함께 세우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이나 조건이 어려워도 자리에 있다고 해서 조금도 낙심하거나 자포자기할 필요가 없다.

근심과 걱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주님께 나아가라.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만날 때 변하여 새 사람 되고 복음을 전하는 가치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법이다. 주님께는 가치 없는 존재란 절대 없다. 그분의 손에 들리기만 하면 마른 막대기라도 가치 있게 사용하신다. 사실 우리는 모두 무가치한 존재들이지만 능력의 하나님의 손에 잡힐 때, 가치 있게 사용 받을 수 있다. 주님의 손길은 소망 없는 우리에게 소망을 안겨 준다.

시편 114편 주해와 적용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본문의 개요

앞에서 언급된 시가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했다면, 여기에서는 출애굽의 신현 은총을 노래한다.

앞의 시편이 존귀하게 만들어 주신 은총을 노래한다면, 여기에서는 그 가정들의 집합체인 이스라엘 언약 백성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노래하고 있다.

다른 출애굽을 노래하는 시들과 달리 이 시는 매우 경쾌하게 출애굽 당시의 신현으로 나타난 자연계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다.

우선 본 시는 시편 113편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사상적으로는 두 시가 공통으로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곤경에서 건지신다고 한다.

단어 면에서는 두 시 모두 출애굽 당대에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강을 가르신 사건(3, 5절), 시내산에 여호와의 강림(4, 6, 7절), 광야에서의 기적(8절)을 언급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초점은 출애굽 시의 신현을 동반한 자연계의 격변에 두고 있다. 바다, 요단강, 산들, 땅, 반석 등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에게 이런 자연력들은 치명적 장애물이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들을 기적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 이 시는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불가능은 하나님 앞에서 기적의 재료가 된다.

사고의 흐름을 볼 때, 1~2절은 이 시의 시간적 틀을 출애굽 시대로 고정시킨다. 3~4절은 홍해나 요단강, 그리고 산들과 언덕들이 그때에 하나님을 두려워했다고 노래한다. 5~6절은 앞서 언급된 자연력이 어찌하여 그렇게 무서워했는지 수사적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7~8절은 온 땅이 권능

음악, 그리고 설레임

시편 107편 (개역개정) – 04:43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3.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4.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3.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4.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16. 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17.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18.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19.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2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22.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 23.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24.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25.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27.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28.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30.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3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32. 백성의 모임에서 그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그를 찬송할지로다 33. ○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34. 그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아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시며 35. 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 36. 주린 자들로 말미암아 거기에 살게 하사 그들이 거주할 성읍을 준비하게 하시고 37.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38. 또 복을 주사 그들이 크게 번성하게 하시고 그의 가축이 감소하지 아니하게 하실지라도 39. 다시 압박과 재난과 우환을 통하여 그들의 수를 줄이시며 낮추시는도다 40. 여호와께서 고관들에게는 능욕을 쏟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하게 하시나 41. 궁핍한 자는 그의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시고 그의 가족을 양 떼 같이 지켜 주시나니 42.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43.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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