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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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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0

스가랴. 말라기. 시편 20. 제 20 편.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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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8/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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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0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시편 20. 20. 1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네 모든 소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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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1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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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0 KLB – 승리를 위한 기도 – (다윗의 – Bible Gateway

승리를 위한 기도 – (다윗의 시.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른 노래) 네가 환난을 당할 때 여호와께서 네 기도에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이 너를 보호하시며 성소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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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1/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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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의지한다면…(시편 20편) – 유평교회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은 병거와 말을, 우리는 여호와를 자랑한다”입니다. 다윗이 만약 하나님과 병거를 동시에 의지했다면 그래서 전쟁에 나가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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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4/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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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0편은 전쟁에 나가기 직전의 시입니다. 이 시는 전쟁이 나면 출정했던 왕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고대사회는 전쟁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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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ooyoungro.org

Date Published: 12/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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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6(수) “시편 20:1-9” / 작성: 정한조

제가 시편에서 헤아려보니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가 시편 150편 중에서 53편이 있는데, 그 중에서 다윗의 시가 39편, 고라자손의 시가 9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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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7/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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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6 – 수요기도회 설교문(시편20편) – 숭실교회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환난을 이기는 능력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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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spch.net

Date Published: 10/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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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0편 & 성경주석 – BIBLE STORY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시 20편과 21편은 예전 시편의 쌍을 이루는 시들이다. 20편은 왕이 출전하기 직전에 그를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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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1/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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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전시편강해(시편20편) – 김광석 목사와 함께 하는 성경 공부

(1) 경건한 삶을 축복한다. 축복을 받는 사람은 기도하고, 성소에 나아가며, 번제를 드리는 자이다. 우리 친구들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어야겠다. (2) 위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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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386.tistory.com

Date Published: 7/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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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시편 20 편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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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xrWRE6S5VXA

시편 20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4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5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6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8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9 1)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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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4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5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주를 의지한다면…(시편 20편)

주제 : 주를 의지한다면…

본문 : 시편 20편

설교자 : 최종혁

1[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4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5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6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7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8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9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우리가 습관적으로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의미를 모르고 하거나 알아도 개의치 않고 합니다. 저는 가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이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할렐루야’라는 말을 하면 깜짝 놀랍니다. 저는 그 말의 의미인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로 듣기에 이상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도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주님 뜻이면’이나 ‘주님 의지하고 이렇게 하세요’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주님 의지하고’라는 말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주로 하는 말인데,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시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에 어떤 의미를 담아야 하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치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축복하고 위로해주는 기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잘 읽어보면 그것은 개인의 어려움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5). 여기서 개가를 부르고 깃발을 세운다는 것은 전쟁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시편 20편의 배경이 되는 상황은 개인의 어려움이 아니라 한 민족, 또는 한 나라의 어려움인 것입니다. 현재 전쟁을 앞둔 상황입니다. 시편 20편과 21편은 짝을 이루는 시편인데, 20편은 전쟁을 앞두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고, 21편은 그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시입니다.

본문은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전쟁을 앞두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너”라는 표현은 ‘왕’을 가리킵니다. 백성들이 왕을 위해서 축복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 백성들의 그 축복을 받아 확신 가운데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이 시편의 내용입니다. 이 상황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함’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인지 같이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1-5절은 백성들이 왕을 향해서 축복의 기도를 하는 내용입니다. 왕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승리하게 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1). 이것은 축복의 기도인데, 앞의 기도들과 달리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기도하기 보다는, 한 대상을 놓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여호와여’라는 부름은 없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복을 비는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를 높이 드시며”에서 ‘높이 든다’는 것은 높은 곳에 있어서 아무도 접근할 수 없도록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왕을 보호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 하나님에 대해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하나는 “여호와”이고 또 하나는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둘 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에서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적인 의미로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기에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2). 도움은 성소와 시온에서 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이름을 두신 곳, 하나님의 임재를 두신 곳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6절 참고) 또한 동시에 성소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장소의 제약을 받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소를 단지 상징적인 의미로 보시지 않고 그곳에 실재하셨으며 또한 그곳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소(성소가 있는 시온산)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했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처소였기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고 허가받은 사람도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규율을 어기면 심판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어야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나는 그런 것 필요없다’ 하시지 않고 다윗의 그 마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다윗이 지금 그 성소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관심 없는 분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3). 여기서 말하는 제사들(소제, 번제)은 인간의 죄 때문에 드리는 제사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헌신의 의미를 가지고 드렸던 제사입니다. 그 예는 사무엘상에서 볼 수 있는데 사무엘이 전쟁 전에 번제를 드리고 기도했던 것들과, 우리가 잘 알기로 사울왕이 사무엘이 오기 전에 상황이 위급하여 스스로 먼저 제사를 드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사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삼상 13:12).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 위해 이러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어떤 거래의 의미는 물론 아니었습니다. 시편 51편을 보면 하나님께서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제사들은 진정한 마음에서 나오는 제사였습니다. 이러한 번제가 드려질 때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헌신했을 때 그 제사를 받으시고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4). 이 기도는 참으로 담대한 기도이면서 한편으로 당돌해 보이기도 합니다. 왕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소원을 이뤄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에 원했던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7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7). 이 모든 전쟁을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과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던 다윗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의 삶과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나의 영향력이나 영토를 넓히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기 위해 모든 계획을 세우고 지금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5). 왕이 마음에 소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뤄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들의 축복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주를 의지한다면 환란 중에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언급하고 그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지금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구할 때 그것이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있을 때 의지할 만한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것은 정말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라면 환란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을 먼저 찾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주를 의지한다면 주의 이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20편에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표현이 세 번 등장합니다(1,5,7절).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체를 가리키거나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할 때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상관없이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과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경험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그분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해야 할 하나님은 분명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려면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하고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분의 이름으로 구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행하며 그 결과로 그분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6-8절은 내용이 조금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제는 “나”로 바뀝니다. 5절까지가 다수(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들을 대변하는 대표)가 말하는 내용이었다면 이제는 그 축복의 대상이 되는 ‘왕’이 직접 말하는 부분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주를 이뤘다면 이제는 하나님께 대한 확신의 말들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6). 왕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부은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구절이 개역성경에는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자,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를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는 ‘왕’을 가리킵니다.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6). 하나님이 능력의 손으로 구원하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 땅의 능력이 아닌, 거룩한 하늘의 능력이고 육신의 능력이 아닌 영적인 능력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왕이 있었지만 왕정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신이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신정국가가 있었지만 그들은 가짜 신을 만들어놓고 이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정국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와서 왕을 세워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려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서 거절한 것입니다. 왕을 세우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신명기에서 왕에 대한 규례를 주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던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했던 왕은 다른 나라의 왕들과 같은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라 대체자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사울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원했던 그들의 왕 사울은 실패했습니다. 그가 실패한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실패한 이후 하나님은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다윗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하기를 원했던 왕입니다. 자신이 왕이었지만 자신 위에 궁극적인 왕이 있음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말하고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셨습니다. 적들의 손에서 구원해내셨고 그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7). 다윗은 “어떤 사람”들과 “우리”를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그들은 병거나 말을 의지하는 자들이고 우리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8), 다윗은 이렇게 담대하게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당시의 전쟁은 얼마나 병거와 말, 좋은 무기가 있느냐가 성패를 가늠했습니다. 그래서 나라마다 더 많은 군대를 모으고 더 많은 말을 키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런 나라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모든 나라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병거가 많은 나라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나라가 승리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시 33:16-19) 왜 많은 군대가 승리를 보장하지 못할까요? 왜 군마가 많은 것에 대해 헛되다고 말할까요? 전쟁의 성패와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기고 지는 것을 주관하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그 편에 서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사 31:1-3).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병거가 많고 말이 많으면 패배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병거가 많거나 말이 많은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는 유혹에 빠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에게 병마를 많이 두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할 유혹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약 이스라엘의 왕이었다면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쉬웠을까요? 바로 옆의 나라에서 수많은 병거를 만들고 군사 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보는데 말입니다. 그것들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을 신뢰할 거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과 병거를 준비하고 하나님도 의지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지 않은 증거입니다.

정말 의지할 데가 없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쉽습니다. 히스기야와 여호사밧은 적군이 그들을 둘러쌌을 때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의지할 것이 많았던 솔로몬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병거나 말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병거나 말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를 의지한다면 주만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그 하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보험처럼 다른 것을 두고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의지할 것이 많은 세상에 살아갑니다. 그것에 대한 유혹이 강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물과 하나님에 대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무엇을 두고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 위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7절에서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라고 번역되었지만 여기서 “의지하다”는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미를 위해 끼워넣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은 병거와 말을, 우리는 여호와를 자랑한다”입니다. 다윗이 만약 하나님과 병거를 동시에 의지했다면 그래서 전쟁에 나가 승리했다면 그는 하나님과 함께 병거도 찬양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만 찬양하고 그분을 자랑하기 원한다면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싸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뤄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랑할 것이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도 의지하면 하나님만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의지할 것이 많은 세상에 삽니다. 꼭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나 싶은 시대를 삽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넘쳐나 하나님을 의지할 생각조차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순간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자랑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에 기울이며 그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다른 말들이 들릴 때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제시하시는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할 때 주변의 사람들이 들었다면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병마는 있어야지” “이래서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어?”라고 말입니다. 그 말에 다윗은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도 그와 비슷한 상황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에 따라 살 때 세상은 다른 얘기를 합니다. 그것보다 이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학원에도 보내야 한다고 말하고, 일을 그렇게 해서 되겠냐고 말하며, 돈이 최고라고, 가족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스펄전은 주석에서 “모든 능력의 하나님은 모든 능력들보다 강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믿고 있다면 다른 어떤 수많은 능력들이 있든지 그것이 얼마나 강하게 보이든지 상관없이 이 하나님이 언제나 더 그들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지혜의 하나님은 다른 모든 지혜들보다 더욱 지혜롭습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9). 이 말은 백성들이 왕을 구원해달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에는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라고 번역되었고, 킹제임스 성경에는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께서는 우리 말을 들으소서”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 왕을 구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과 백성들이 함께 드리는 기도일 것입니다. 인간 왕이 그 자리에 있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는 궁극적인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9절의 내용입니다.

오늘 살펴본 시편 20편은 전쟁을 앞둔 자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실제적인 전쟁을 했고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현재 우리는 눈에 보이는 전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실재하는 전쟁이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전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주님께 구하십시오. 주님을 의지하신다면 주님의 이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성경을 통해 발견하십시오. 주님을 의지한다면 주님만 의지하시고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주인되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 의지하고’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곤 합니다. 그것이 입에서만 맴도는 말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찾고 의지할 때 그 이름이 세상에서 찬양받고 우리가 그분을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2018/05/16(수) “시편 20:1-9” / 작성: 정한조

본문 시편 20:1-9

찬송가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왕을 위한 기도(1-5절)

오늘 시편의 표제어도 어제와 동일한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시편에서 헤아려보니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가 시편 150편 중에서 53편이 있는데, 그 중에서 다윗의 시가 39편, 고라자손의 시가 9편, 아삽의 시가 5편이 있습니다. 시편 전체의 3분의 1 이상이 인도자(성가대의 지휘자)를 따라서 부른 노래입니다. 모든 시편이 그러하지만, 특히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 표제어가 붙은 시편은 개인의 하나님을 향한 고백과 찬양이 공동체의 고백과 찬양이 되었음을 또렷하게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 1-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이 시편이 다른 시편과 다르게 느껴지시는 부분이 없으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다른 시편과는 뭔가 다르지 않으십니까? 대명사 ‘내’가 아니라 ‘네’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의 표제가 ‘다윗의 시’인데, 정확하게는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시(기도)’라기 보다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 드린 시(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전쟁에 나가는 왕을 위해 드린 기도로써, 신하들이 또는 백성들이 드린 중보기도로 이해됩니다. 다윗의 시대에는 늘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시편이 어느 전쟁 전후에 기록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전쟁에 나갈 때에 신하들과 백성들이 드려준 기도를 기억하였다가, 전쟁에서 돌아와 그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렸고, 그것이 이스라엘 전체의 노래가 된 것입니다.

1절을 다시 봉독하겠습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환난 날’은 ‘전쟁에 임한 날’일 것입니다. 그 때에 다윗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왕을 위해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세 제자,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시고 산에 올라가셔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의 용모와 입으신 옷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쉬시고 머리를 숙이신 후에 영혼이 떠나가실 때까지 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는 매일매일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것이 전쟁터와 같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십자가지심을 앞 둔 겟세마네에서는 더욱 간절하게 기도를 하셨습니다.

다윗은 지금 신하들과 백성들로부터 기도를 받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의 기도를 받고 있다는 것도 굉장한 용기를 줍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올수 있었음은 많은 분들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기 때문임을 깊이 인식한다면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은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전 존재를 의미)’이 다윗을 높이 들어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자신들의 많은 조상 가운데서 왜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했을까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요셉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여호수아의 하나님 등등 다 가능함에도 말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야곱의 12아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었기 때문에,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와 동의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야곱은 참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가 스스로 생각해도 얼마나 굴곡진 인생을 살았던지, 그가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이 바로왕 앞에 섰을 때에, 바로왕이 야곱에게 “어르신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야곱이 답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입니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습니다(창 47:9).”라고 답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일생을 한 마디로 ‘험악한 세월’이라고 했는데, 참 솔직하고도 정확한 표현입니다. 야곱이 그렇게 우여곡절 속에서도 하나님을 꼭 잡고, 엉덩이뼈가 부러져 절면서까지 ‘이스라엘’의 이름을 얻어낸 것처럼,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다윗왕을 꼭 붙들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2-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성소’와 ‘시온’은 같은 개념으로 ‘하나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와주시고 붙잡아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소제’는 ‘감사제’이고, ‘번제’는 제물을 전부 불태워 드리는 ‘헌신제’입니다. 다윗은 생의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드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의 방법을 따라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와서 예비한 자리에 둔 후에, 헌신과 감사의 표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또한 하지 말아야 할 인구조사를 한 후에, 재헌신과 용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늘 하나님을 향하는 다윗왕의 마음을 알았던 신하들과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받아주시기를 기도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음악적 지시어인 ‘셀라’는 그 뜻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쉬어라’, ‘올려라’의 의미로 여겨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터로 나아가는 다윗왕을 위해 기도를 드리면서 ‘셀라_쉬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목숨을 거는 싸움입니다. 그 때는 한 말씀이라도 하나님께 더 올려드려서 간구하고 싶을 때입니다. 상황의 절박함과 간절함으로 인해서 그침이 없이 기도를 올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때가 ‘셀라_쉬어라’가 필요할 때입니다. 우리의 상황이 절박할 때는 우리의 말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느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겨를이 없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미 네 말을 다 알아들었으니 이제는 내가 말하게 하라고 하셔도 그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미 응답의 말씀을 하셨음에도, “하나님, 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반복해서 우리의 소원을 알려드리고만 할 때도 있습니다. 기도는 올려드림도 중요하지만, 들음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기도에도 때때로 “셀라”가 필요합니다.

잠시 기도의 호흡을 고르며 쉼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높여 기도합니다. 4-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4절에서 5절로 넘어가면서 ‘너’라는 2인칭 대명사에서 ‘우리’라는 1인칭 복수 대명사로 바뀌었습니다. 즉 ‘네(다윗) 마음의 소원’은 곧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일 것이고, 그 소원은 곧 이스라엘 전체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축구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스웨덴이나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이기게 되면, “그들이 이겼다”고 하지 않고, “우리가 이겼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경기장에는 11명이 있지만, 그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발에 공이 한 번도 닿지 않아도, 경기장에서 잔디 한 번 밟지 않아도 대표팀이 경기를 이기면, 우리가 이긴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왕의 승리를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다윗왕의 패배는 자신들이 패배가 되며 그 결과는 노예가 되거나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서 대속의 죽임을 당하셨지만, 부활하심으로써 주님의 부활과 승리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과도 동일한 이치입니다.

승리의 확신(6-9절)

하나님께서 다윗왕으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실 줄을 믿고서 6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이제는 주어가 1인칭 단수가 되었습니다.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터로 나가는 다윗왕이 승리하기를 간구했습니다. 그 기도가 이제는 다윗의 확신, “응답하시리로다”로 바뀌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오른손(능력)이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팔은 강하시며, 그 능력은 우리를 건져 올리기에 충분한 힘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언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용기이자 소망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한 다윗은 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당시에 ‘병거와 말’은 지금의 군대로 하면 ‘탱크와 대포를 보유한 기갑부대’와 같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전쟁에는 무기와 군인이 하나라도 더 있는 것이 좋고, 말이 한 마리라도 더 있으면 훨씬 유리합니다. 그 무기들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이 전쟁의 승패는 화력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느냐 아니냐로 판가름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정제도가 생기기 훨씬 전에 신명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왕이라 해도 군마를 많이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되며, 군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이집트로 보내서도 안 된다.(신 17:16)”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무엘하 8장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다윗이 소바왕 하닷에셀과 전쟁을 하여, 그로부터 마병 1700명과 보병 2만 명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마병이 1700명이라 함은, 말도 1700마리를 잡았다는 의미입니다. 말이 1700마리면 이스라엘의 국방력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중에서 100마리만 남기고서 나머지 말들은 발의 힘줄을 끊어버렸습니다. 전쟁을 말의 힘, 즉 무기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그 마음을 귀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다윗이 가는 곳마다 이기게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겠다는 고백은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삶과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8-9절입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비틀거리며 엎드려짐과 일어나 바로 섬, 이것은 세상을 신뢰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이 땅에서는 혹 이것이 거꾸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반드시 이렇게 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부르고, 응답해 주시기를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시편은 왕이 전쟁터로 나갈 때에 신하들과 백성들이 드린 기도이고, 그것을 다윗이 기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실제 총과 칼을 들고 싸우는 전쟁이 없지만,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인지하든 하지 못하든 간에 날마다 영적인 전쟁의 연속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편의 기도는 우리가 받아야 하는 기도이고,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매일 드려야 하는 기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진 것이 많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총명함과 뛰어남이 있으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힘을 가지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를 얹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 않는 ‘엑스 호도스_길 밖의 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만을 의로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으로 삼는 복된 주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다윗은 자연을 보고도 기도할 줄 알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서도 기도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골리앗과 싸워서 이기는 인생에 순풍이 불어올 때도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주님을 의뢰했고, 아들에게 쿠데타를 당해서 신발도 신지 못하고 피난을 가야하는 인생에 역풍이 불어올 때도 세상을 붙잡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붙잡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기도를 받을 줄도 아는 사람임을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분량이 있게 하시고, 또한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살아가는 것이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기 때문임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다윗이 다른 사람들이 의지하는 병거나 말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며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사람들과는 다른 ‘엑스 호도스_길 밖의 길’을 걸어간 것처럼, 우리도 재물이나 크고 작은 힘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가정과 일터, 삶의 자리에서 ‘엑스 호도스_길 밖의 길’을 걷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마음을 다해서 기도해 보신 적은 언제였습니까? 누구를 위해서 무슨 내용으로 중보하셨습니까?

2. 다른 사람이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때에 어떤 느낌이셨습니까?

3. 세상 사람들의 의지하는 물질이나 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다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누리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다가 낭패를 당하신 적은 없습니까?

4. 오늘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하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2020.05.06 – 수요기도회 설교문(시편20편)

2020.05.06 – 수요기도회 설교문(시편20편)

왕을 위한 기도!

본문말씀: 시편 20:1-9

요즘 나라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많습니다. 코로나 19가 전례 없는 어려움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사회, 경제, 정치, 종교 등 모든 영역에 측정하기 어려운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지도자들의 역할이 참 중요한데, 여전히 화합보다는 갈등이 심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어려움들보다도 제 개인적으로는 더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일들입니다. 이것이 나라의 정신을 이끌어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보면 하루가 멀다하고 이런 저런 도덕적, 영적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히나 n번방과 같은 사건은 우리나라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자들이 로마의 흥망성쇠를 연구하면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토록 강력했던 로마의 멸망이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냐면요? 도덕적인, 윤리적인 타락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어떤 나라의 강력함을 유지하는 근간이 바로 도덕적인 것,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것을 건강하게 해주는 것이 종교입니다. 기독교입니다.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오늘 이 나라를 위해 이러한 역할을 해주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부정적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오늘 이 나라가 어쩌면 총체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도대체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시편 20편의 말씀이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쳐줍니다.

오늘 말씀 1절을 보십시오. “환난 날에”라는 말로 20편 말씀이 시작됩니다. 지금 다윗이 통치하는 나라, 이스라엘에 환난이 닥쳐왔습니다. 그래서 매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환난의 날이 닥쳐온 것일까요? 오늘 말씀 5절에 “승리”나 “깃발,” 그리고 7절에 “병거”나 “말”이 환난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추측하게 해주는 단어들입니다. 아마도 대적의 침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국가적인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것도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위기를 맞아 다윗은 군대를 이끌고 출전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출전을 하기에 앞서서 한 일이 있습니다. 3절을 보시면,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전쟁에 나가기에 앞서서 하나님께 나가서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전쟁의 모든 것을 의탁하며 기도하는 겁니다. 그 자리에는 다윗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국민이 다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왕이 하나님께 전쟁을 의탁할 때에, 모든 국민이 왕을 위해, 그리고 군대를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문의 제목을 “왕을 위한 기도”라고 적었는데요. 사실 본문을 묵상하면서, 핵심어가 기도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절에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라고 말씀하고요. 5절에도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라고 말씀하고요. 7절에도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와 능력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능력”을 말하는 겁니다. 지금 다윗과 백성이 전쟁터에 나가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믿고 먼저 기도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유사하게 저와 여러분이 오늘날과 같이 나라와 온 국민이 겪고 있는 환난의 때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환난을 이기는 능력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환난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자. 하나님을 찾자.” 이것이 시편 20편의 교훈입니다. 이 교훈을 조금 더 자세하게 나누겠습니다.

말씀을 연구하면서, 시편 20편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중심어를 핵심으로 세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단락은 1에서 5절입니다. 이 단락은 출전하는 왕을 위한 백성의 기도로 되어 있습니다. 5절에 보시면 “우리가”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기도하는 주체가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외에 모든 인칭대명사는 모두 “너”로 되어 있습니다.

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2)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3)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4)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5)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6)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

7)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8)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9)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주시기를 원하노라.”

그러니까 1절에서 5절은 백성이 출전하는 다윗 왕을 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5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여! 다윗 왕에게 승리를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 모두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해주십시오.” 그것입니다. 조금 후에 다시 말씀을 나누겠지만,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분, 환난에서 건지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역사를 보면, 위대한 믿음의 지도자와 백성들은 위기의 순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처칠이 그랬습니다. 몇 년 전에 덩케르크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2차 전쟁 당시에 연합군이 독일군에 밀려서, 덩케르크라는 지역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20만 명인가 그랬습니다. 앞에서 독일의 강력한 탱크 부대가 다가오고 있고, 위에서는 독일의 비행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만일 하루나 이틀 뒤에는 20만이 꼼짝없이 전사할 상황이고, 그렇게 되면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때 영국의 지도자 처칠과 국민들이 행한 일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연합군이 있는 곳에는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이 있는 곳에는 엄청난 비가 내려서 탱크가 조금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간을 활용하여 영국에서 수많은 배들이 건너가서 군인들을 구출하게 되었고, 결국 승전의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이것을 말하지 않지만,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위기의 때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이 나라를 위해, 깨어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둘째 단락은 6절입니다. 인칭대명사가 “우리”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나”로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1절로 5절까지에서 백성이 다윗 왕을 위해 기도하잖아요. 다윗이 그 기도를 받아서, “하나님의 이름” 앞에 자신의 믿음과 확신을 고백하는 겁니다. 무슨 믿음인가? 무슨 확신인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한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에게 승리를 주시리라는 확신입니다.

저는 이 다윗의 믿음의 응답을 보고, “그렇다. 기도하고 확신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기도하고 확신해야만 기도의 열매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고 확신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신다. 혹은 기도를 들어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다.”는 것을 믿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이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가복음 11장 24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또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1장 6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말씀하면서, 의심하는 자는 두 마음을 품은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러한 말씀이 기도를 우리 소원성취의 도구로 사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진짜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다. 그런 능력이 있는 분이다.”는 것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교회에서 앞으로 누구든지 대표기도하실 때에, 저와 여러분은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아멘의 화답이 하나님께 상달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멘”으로 화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진짜 살아있는 말씀이 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 단락은 7절에서 9절입니다. 이 단락의 각 절에 보시면 “우리는”이라는 말이 한 번씩 나옵니다. 인칭이 “우리”로 되어 있는 겁니다. 이 “우리”는 1절에서 5절에서 기도한 백성이 아닙니다. 기도한 백성과 그에 응답한 다윗이 함께 “우리가” 되어서 승리를 주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그 찬양의 핵심이 7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어떤 사람은 군사력을 의지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혀의 힘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힘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백성과 믿음의 사람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이름만 자랑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어떤 믿음을 표현하는 것일까요? 전쟁에서의 승리는 군사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군사의 숫자와 무기의 힘에 달린 게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인간의 힘과 지혜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힘과 능력에 달린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다윗이 이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에 그의 진짜 무기는 칼과 창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무기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입니다. “다윗에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누가 승리했나요? 골리앗의 엄청난 힘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무기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간 다윗의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이 믿음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왕이 여호사밧이었습니다. 모압과 암몬 군대가 유다를 쳐들어왔습니다. 군사가 너무 많습니다. 자신의 군사력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 환난 앞에 여호사밧이 행한 일이 기도의 일이었습니다. 여호사밧 뿐 아니라 모든 백성이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성전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역대하 20장 9절입니다.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성전에 계시는 “주의 이름”으로,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그의 능력을 의지하여서 기도하였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레위인 야하시엘을 통하여 응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성경말씀입니다. 역대하 20장 15절에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 말은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군대 대신에 하나님께서 친히 나가 싸우신다. 그러니 전재의 승패는 사실상 이미 결정이 난 것이다. 그 말씀입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다음 날에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을 의지하면서, 창과 칼이 아니라 찬송을 하면서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그렇게 찬송하면서 나갔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이거 미친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전쟁을 하러 나가는데, 무기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하면서 나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이렇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사밧과 백성은 제 정신으로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어떤 정신으로 나갔는가? 믿음의 정신으로 나갔습니다. “전쟁은 내게 속한 것이다. 내가 대신 싸울 것이고 승리를 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 믿음의 정신으로 나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압과 암몬의 대군을 완전히 물리쳐 주셨습니다.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백성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한 일은 모압과 암몬의 사람들이 남겨놓은 엄청난 보물을 거두어들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찬송으로 전쟁터에 나갔잖아요. 결말이 똑같았습니다. 찬송하면서 돌아왔습니다. 역대하 20장 26절에 보면, “넷째 날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 “브라가 골짜기”는 “송축의 골짜기, 찬양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의 때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각자에게 환난이 닥칠 때에도, 가정에 환난이 닥칠 때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민족이 환난을 당할 때에도 역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에 의지하여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가정과 생업과 자녀를 위해, 특히나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제목:

-하나님이시여! 너무도 어려운 이 나라, 이 민족을 돌아보시옵소서!

-이 어려운 때에 우리 성도님들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옵소서!

시편 20편 & 성경주석

<시편 20편 서론>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시 20편과 21편은 예전 시편의 쌍을 이루는 시들이다. 20편은 왕이 출전하기 직전에 그를 위해 부른 시임이 분명해 보이고, 21편은 그가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부른 시인 듯이 여겨진다. 시 20편은 예배 의식에서, 1~5절은 회중이, 6~8절은 왕 혹은 레위 사람들 중 하나가, 9절은 백성이, 교창 형식으로 부르도록 배열된 시인 듯이 보인다. 「수리아역」의 표제에는 이 시가 다윗이 아람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로 더불어 전쟁을 할 때 지은 시로 되어 있다.

* 수리아역 : 고대 수리아어로 번역된 성경. AD 2세기 후반에 작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시편 20편 개역한글>

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4.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5.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6.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7.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8.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9.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

<시편 20편 성경주석>

20:1 환난.

히브리어 차라(s.arah), “고통”, “궁핍.”

20:1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1~5절은 왕이 전장으로 나가기 직전에 그를 위해 드리는 중보의 기도이다. 아마도 이 기도는 희생제물의 연기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동안에 드려졌을 것이다.

20:1 야곱의 하나님.

창 35:3의 경험에 대한 간접적 언급인 듯하다.

20:1 이름.

하나님의 실제 이름은 모음과 더불어 야훼(Yahweh)로 음역(音譯)되는 히브리어 문자 YHWH로 표기된다(참조 출 6:3). 이 단어는 하야(hayah), “있다”, “~이 되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야훼라는 어형은 고대 버니게[페니키아]어 어법에 근거해서 “존재의 원인” 또는 “유지하는 자”로 번역될 수 있는 동사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야훼라는 이름은 존재의 제1원인으로서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 이름은 신성(神性)이 나타내는 모든 것을 대표한다. 더 상세한 설명은 시 7:17 주석을 참조하라.

20:2 시온.

참조 시 2:6.

20:2 붙드시며.

문자적으로 “지탱하다”, “떠받치다.”

20:3 소제.

히브리어 민호트(minh.ot), 레위법에서는 곡물을 드리는 제사를 일컫는다(참조 레 2:1 주석). 좀 더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민하(minh.ah)가 “선물”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아벨의 제물(창 4:3, 4)과 유화를 위해 제공된 야곱의 선물(창 32:13)을 나타내는 데 쓰였다.

20:3 번제.

히브리어 올라(‘olah), 제물을 완전히 다 태우는 제사(참조 레 1:3 ).

20:3 셀라.

참조 81쪽.

20:4 네 모든 도모.

백성이 왕의 모든 계획과 그가 전쟁에서 취하는 모든 조처의 성공을 위해 기도한다.

20:5 이름.

참조 시 7:17 주석.

20:5 우리 기를 세우리니.

하나님이 승리를 성취한 것으로 여기며. 이것으로 백성의 일반적인 기원이 끝난다.

20:6 기름부음받은 자.

참조 시 2:2 주석.

20:6 이제 내가 아노니.

6~8절은 왕이나 어떤 레위 사람이 혼자서 회중의 기도에 응답하는 부분이다. 1~5절에서의 “너”와 “우리”라는 대명사가 이제 “나”라는 대명사로 바뀐 것이 이 점을 잘 설명해 준다. 회중이 그들의 기원에서 소망하였던 것이 이제는 기정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20:6 그 거룩한 하늘.

문자적으로 “그의 거룩함의 하늘.”

20:6 응락하시리로다.

(「제임스왕역」에는 “들으시리로다”로 되어 있음-역자 주). 문자적으로 “응답하시리로다.”

20:7 병거.

군인들을 전장(戰場)으로 수송하고 전투를 용이하게 하는 데 쓰인 전쟁용 병거. 바로는 병거를 신뢰하였다(출 14:7). 다윗의 북쪽 원수였던 아람 사람들은 병거와 기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강하였다(참조 대상 18:4; 19:18). 다윗 자신의 군대는 전체가 보병만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솔로몬은 병거와 기병으로 구성된 대규모의 상비군을 발족시켰다(참조 왕상 10:26~29). 하나님의 백성이 승리를 위해 무력에 의존하는 것은 결코 그의 계획이 아니었다(참조 신 17:16). 이 절은 무력에 대한 의존을 배척하는 놀랍고도 올바른 신앙 고백이다.

20:8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이 절에서 동사들이 예언적 완료 시제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왕이 그의 원수들이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그 사건을 이미 끝난 사건처럼 묘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절은 반의대구법의 한 실례이다.

20:9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70인역」은 이 절을 “여호와여, 당신의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당신을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로 번역하였다.

「제임스왕역」의 번역(“구원하소서, 여호와여”[save, Lord])은 이 시의 도입부와 조화를 이루는 듯이 보인다. 이 번역에는 하늘 왕에 대한 완전한 확신이 표현되었다. 이 절은 필시 6~8절의 독창에 대한 응답으로 회중이 부른 노래였을 것이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6권

스펄전시편강해(시편20편)

시편 20편

[개 요]

주제-이 시는 왕이 띠를 띠고 전쟁에 출전하기 전에 부르는 데 적합한 노래로서, 마치 애국가와도 같은 노래이다. 다윗이 전쟁을 앞두고 초조해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시를 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으려면 먼저 자신이 시련을 당해 보아야 한다. 백성들은 사랑하는 왕을 위해서 여호와께 부르짖는다:”하나님이여, 우리 왕을 구원하소서.” 회중이 함께 이 시를 노래로 불렀다는 것은 이 시의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영장으로 한 노래”라는 머리말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머리말에 “다윗의 시”라고 기록된 것으로부터 다윗이 이 시를 지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가 이 시를 언제 작사하였는가를 정확히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시대에 늘 전쟁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칼이 부러질 수는 있었겠지만, 결코 녹이 슬지는 않았다. 킴치(Kimchi)는 머리말에 나오는 “다윗의”를 “다윗에 대해” 또는 “다윗을 위해”라고 해석했다. 다윗이 이 시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이 시의 중심 인물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 시를 읽고서 잠시 동안만 묵상을 해도 이 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주께서 교회를 위해 큰 싸움을 하시는 동안 교회가 그분을 위해 기도하고 부르짖는 기도이다. 영적 전투를 벌이는 하나님의 백성들, 구원의 대장을 머리로 한 성도들은 이처럼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성취하실 것을 기도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를 따라서 짤막한 강해를 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시의 주제는 여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4절왕의 성공을 위한 기도.

5-7절하나님과 그분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에 대한 확고한 신뢰.

8절원수의 패배를 선언함.

9절여호와께 간구함.[강 해]

1환난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4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1절. “환난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은 그들의 왕을 위해 기도한다. 시온의 백성들이 평화의 왕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특히 전투가 있는 시기에는 두 배로 간구하며, 우리 주님께서 슬픔 가운데 있다면 교회가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우리 구세주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날들은 모두 고난의 날이요, 환난날들이었으며, 그분은 그 기간 동안 기도하며 지내셨다. 교회도 주님과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주님이 눈물로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실 것을 또한 간구하는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하던 시간은 특별히 어두운 시간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경외하심을 보고서 그분의 간구를 들어 주셨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기도를 항상 들으신다는 것을 아셨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토록 고민하던 시간에는 땅에 얼굴을 묻고 세 번 기도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다. 주님은 기도하여 힘을 얻으셨고, 그 영적 전투에서 승리자로서 일어나셨다. 십자가에서 드리신 기도도 아버지께서 들으셨다. 시 22편에서 주님은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라고 하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이 되셨다. 주님의 기도하는 삶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려면 우리는 먼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난 중에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자비인가! 또한 아무것도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고난이 천둥처럼 울린다 해도 고난 중에 기도하는 성도들의 목소리는 폭풍을 뚫고 하나님께 상달하는 것이다. 오 예수여,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에 당신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를 들으시리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두려움을 이길 수 있나이다.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너를 높은 곳에 두시고”라고 해석한다. “이름”이란 우리에게 알려진 그분의 성품을 말한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신’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알기 위해 힘써 노력해야 한다. “야곱의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과 성품을 그분의 백성에게 나타내기를 기뻐하신다. 이 존엄한 이름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하늘의 학자만이 이 하나님의 이름에 담긴 뜻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우리 주 예수를 삶과 죽음의 싸움에서 보호하시고 지키셔서 모든 원수들 위에 높이 들어올리셨다. 지금도 그분의 싸움은 그분의 신비한 몸인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교회가 위험에 싸여 있기에 그분은 지금도 위험 가운데 둘러싸여 계신 것이다. 오직 우리 하나님의 영원하신 이름만이 언약을 지키시고 십자가의 군사를 보호하시며, 원수들 위에 높이 들어올리실 수 있다. 고난의 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구세주께서는 침묵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이 충성스러운 자를 지키신다.

“야곱의 하나님”이란 이름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야곱에게는 고난의 날들이 있었다. 그는 씨름하며 기도하여 하나님의 들으신 바 되었고,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셔서 하나님의 시간에 그를 높여 주셨다. 야곱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바로 그 하나님이 지금도 씨름하는 야곱들의 하나님이 되신다.

1절은 고난을 앞둔 자녀, 친구, 사역자들을 축복하는 구절이 된다. 이 구절에서는 육적인, 그리고 영적인 보호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을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2절.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하늘의 성전에서 천사가 와서 우리 주님께 힘을 주었다. 주님은 나무에 달리셨을 때에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행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고 새 힘을 얻으셨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도움처럼 큰 힘을 주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성전에서 오는 구원과 같은 구원도 없다. 이 성전은 우리 주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참된 성전이다.

성도들이여, 고난에 처할 때마다 십자가로 나아가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성소의 도움을 멸시한다. 그러나 세상의 물질적인 도움보다도 성소의 도움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 안다. 그들은 군대의 도움과 재물의 도움을 구하며 사람들에게 아첨한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향한다.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하나님께서는 그분께 간구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멸시당하는 자, 고난에 처한 자를 도와주신다. 기도는 결코 헛되이 돌아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시온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곳이다. 성도들이 모여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들으시고 우리 주님의 신비한 몸인 교회에 선한 것을 부어 주신다. 세상에는 강력 접착제가 있고, 또 물건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처럼 성도들로 하나가 되게 하고, 힘을 주는 것은 없다.

이 구절은 주일 아침에 사람들을 축복하는 구절로 적합하다. 목사가 성도들에게, 또 성도들이 사역자에게 하는 인사로 적절하다. 성도들은 아들 안에 계신 하나님께, 그리고 택하신 교회에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성도들은 이 하나님을 바라며 약속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3절.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 전쟁을 시작하기 전, 왕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다. 하나님이 이 제물을 받으시면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믿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육체를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 이 제물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고, 그분은 지옥의 군대를 격파하셨다. 지금도 그분의 희생 제물이 하늘 성소에 향기를 발한다. 성도들은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며,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바치는 제물을 아들의 희생 제물과 봉헌처럼 받으신다. 우리가 영적 전투를 할 때에 우리는 예수께서 드리신 희생 제물을 바라보아야 한다. 믿음의 눈으로 십자가의 제단에서 피 흘리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을 확신하기 전에는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

“셀라.” 우리는 선한 일을 하느라고 너무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하는 중에도 잠시 쉬는 것이 더욱 빨리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성도들이여, 잠깐 멈추어라. 서두르는 것은 좋지 않다. 잠시 쉬어라. 주님께서 바치신 번제물을 묵상하라. 그리고 당신이 해야 할 일에 전력을 다하라.

4절.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는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기를 소원하셨고, 이 일을 도모하셨다. 초대 교회는 주께서 도모하시는 일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했고, 오늘날 현대 교회는 그 도모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은 이 구절을 약속으로 보아도 좋다.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이 일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워 실행한다면 우리는 꼭 승리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동일한 뜻을 품어야 한다. 우리 주님도 늘 이렇게 하셨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겠는가? 그분도 이렇게 기도해야 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기도를 해야 하겠는가!

5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6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 부음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7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5절.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있다. 이 구원은 주님의 구원이며, 그래서 “너의 승리”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구원을 받을 자는 우리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그 구원을 즐거워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구원을 받고자 결심을 해야 하며, 주님의 구원하시는 팔 안에서 즐거워해야 한다. 이 시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왕이 전투에 나가기 전에 이미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전쟁을 시작하기 전부터 개가를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온전히 승리를 거두신 것을 이미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더 즐거워해야 하겠는가! 믿음이 없는 자들은 죽음이 이르기도 전에 장례식을 생각하며 흐느낀다. 왜 우리는 승리의 춤을 추기 전에 믿음으로 노래하지 못하는가? 꽃봉오리는 그대로 아름다운 것이며,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도 귀한 것이다. 꽃봉오리는 꽃이 필 것이고, 약속은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즐거워한다면,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게 될 것이다. 신하들이 즐거워하고 행복을 누린다면, 이것은 군주에게 명예가 된다.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원수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면 우리는 저항을 하고, 대적이 넘어지면 우리는 승리의 깃발을 흔든다. 어떤 사람들은 이 왕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저 왕의 이름으로 싸움을 벌이나, 충성스러운 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전쟁에 나간다.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그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악한 세대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살아 계시고 그분의 교회에서 통치하시는 한, 우리는 두려움으로 기를 거둘 필요가 없으며 거룩한 용기로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예수의 놀라운 이름은

모든 원수들을 물러가게 하네

온유하신 예수, 진노하신 어린양은

사자와 싸움을 벌이시네.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교회는 이 사실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음의 소원을 이 짧은 구절에 담을 수 있다:”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우리 주님께서 드리신 기도 중에서 이 기도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요 17:24).

6절.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 부음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우리는 살아가면서 배운다. 그리고 우리가 배운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인정한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는 기쁨을 상실한다. 이런 사람은 “이제 내가 아노니”라는 말을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 기만에 빠져서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이제 더 이상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자신의 무지함을 아는 영혼들은 여호와의 가르치심을 받고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즐거워할 것이다.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자는 종종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교회는 주 예수께서 큰 싸움에서 승리하실 것을 위해서 기도했고, 이제 믿음으로 전능하신 분의 팔로 그분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안다.

“기름 부음받은 자.” 이 표현은 독특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분은 모든 세상 앞에서 위대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을 받으셨으며, 여호와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서 이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질을 부여받으셨다. 여호와 바로 그분께서 예수께 기름을 부으시고 왕과 구세주로 삼으셨으며,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이 우리의 방패가 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된다.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구세주께서 싸움을 하시는 동안 그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이 역사할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 이 두 가지 특성 때문에 하나님은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도 들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우리의 기도는 하늘까지 도달한다. 하늘은 거룩한 곳이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깨끗하게 하셔서 하늘까지 상달하게 한다. 우리는 극한 어려움에 처해 있으나, 하나님의 팔은 강하며 그 능력은 구원하시는 능력이다. 그 힘은 오른손에 있기에 하나님이 언제든지 구원하실 수 있다. 간구하는 성도들에게 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7절.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진실된 것과 거짓 된 것이 대조되어 있을 때에 진실은 더욱 생생하게 나타난다.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세상 사람들이 의지하는 세상적인 것들과 성도들이 의지하는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과 왕 되신 임마누엘을 대조시킨다. 세상 사람들은 병거와 말을 의지한다. 호화스런 옷을 입은 무사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요란스러운 바퀴 소리를 내며 달리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며, 세상의 헛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한 모습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분별하는 안목을 가진 자들은 이러한 모든 것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다윗의 시대에 전쟁하는 최신 무기는 큰 낫으로 무장된 병거였으며, 이 병거가 달리면서 사람들을 풀을 베듯 잘라 내었다.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은 이런 것들을 자랑했다. 그러나 성도들은 여호와의 이름이 이런 무기들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특히 원수들의 기병대를 두려워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노래하는 자들이 여호와의 군대와 비교하면서 애굽의 군대를 경멸하는 것은 큰 믿음의 표현이다.

아! 오늘날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비열하게도 세상 사람들을 의지하고 있는가! 그들은 마치 여호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예수여, 당신은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십니다. 우리의 단순한 믿음을 결코 더럽히지 않게 하소서.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택하셨고 우리는 또한 그분을 택했다. 이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시다. 우리는 이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계시고, 홀로 행하시며, 변함이 없으시고, 어디에나 계시며,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 아름다운 이름을 경배하자. 세상을 의지하고 그분을 불신하며 그분의 이름에 수치를 돌리는 일을 그만두자. 독자들이여, 이것을 깨달으라. 성령께서 은혜를 베푸사 당신의 영혼으로 이것을 깨닫도록 계시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8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9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

8절. “굽어 엎드러지고······일어나 바로 서도다.” 세상을 의지하는 자들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그 결과가 이처럼 다르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처음에는 바로 서지만, 그들은 곧 스스로 몰락하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엎드러진다. 그들의 기초는 썩었고, 그러므로 때가 이르면 곧 무너지는 것이다. 그들이 자랑하던 병거가 불에 타고 그들의 말이 질병으로 죽으면, 그들이 자랑하던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들은 이들과 다르다. 그들은 처음에는 자주 넘어지나 전능하신 분의 손이 그들을 일으켜 세우면 그들은 즐겁게 일어나 바로 선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그분의 백성들이 받는 유업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나 사망이나 사탄이나 죄, 이 모든 것들을 발로 짓밟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의지하던 자들은 영원히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9절. “여호와여 구원하소서······왕은 응락하소서.” 이 구절은 이 시의 요약과 같다. 시편 기자는 두 가지 소원을 나타낸다. 여호와께서 예수를 구원해 주실 것과 예수께서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첫번째 간구를 들으셨다. 그리고 두번째 간구도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분명히 들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를 마치면서 “여호와께서 우리 왕을 구원하셨다”라고 외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왕이신 예수를 구원하셨다. 그분이 곧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실 것이다!”

[주해와 설명들]

시 20편 전체.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에 계시던 때에, 또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성도들이 그곳에 있었다면,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알았다면, 성도들은 바로 이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메시아께서는 그분의 세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고 하셨다. 그분은 고통하던 시기에 제자들과 함께하면서 받고자 했던 위로를 바로 이 시에서 발견하셨을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메시아의 고난과 그 후에 얻을 영광을 바라보며 노래하는 아름답고 즐거운 시이다. -앤드류 보나.

시 20편 전체. 시편에 있는 많은 시들이 공적 예배를 드리는 데 사용되었다는 흔적이 많이 있다. 시 22편에는 대제사장이신 메시아께서 희생 제물이 되시는 위대한 행동이 나타난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께서 속죄일에 백성들을 위해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이 위대한 행동을 기념하기 원했다. 이 주제는 엄숙하고 장엄하고 백성들의 애정을 자아내는 주제이다. 그러므로 이 주제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준비 과정을 거쳤다. 그래서 적당한 상황에 이를 때, 이에 적합한 인물을 등장시키고 위대한 사건을 연출하기에 합당한 무대를 조성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예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건한 믿음을 고양시키려고 노력했다. 예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 그분의 귀한 성품들을 생각하며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을 느리게 암송한다. 유대 교회에서 공적 예배를 드릴 때에 시 20-24편이 함께 사용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실제로 이런 상황이 있었음직하다-스펄전.) -라일랜드(R. H. Ryland, M.A., The Psalms Restored to Messiah, 1853).

시 20편 전체. 선한 소망은 좋은 것이며, 이것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이것을 가르친다. 자비와 긍휼을 보이는 것은 성도들의 의무에 속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친절한 행사를 보일 수 있다. -윌리엄 플러머.

1절. “환난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그리스도의 생애는 고난의 생애였다. 그분은 고난을 받기 위해 오셨으며, 슬픔과 질고를 아신다······그러나 다른 어느 때보다도 겟세마네 동산에 계시던 날은 환난의 날이었다. 그분의 마음은 무거웠고 놀라셨으며, 흘리는 땀방울은 마치 피가 땅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분의 영혼이 슬픔에 겨워 죽게 되기까지 이르렀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이 고통은 극에 달했다······십자가에서 그분은 백성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아버지의 진노를 견디셨으며,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으셨다. 그분이 동산에 계시던 날,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은 고난의 날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어디에서나, 어느 때나 기도하셨던 것처럼 이 고난의 날에도 기도하셨다. 이 시에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기도한다. -존 힐(John Hill).

1절. “이름.”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란 바로 하나님 그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서 그분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통해서 그분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다. “야곱의 하나님”이란 이름은 야곱과 자비로운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후손들과 자비로운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말한다. 이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고난의 시기에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즉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와 진리와 능력과 지혜와 공의로우심을 알면 알수록,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의심치 않기 때문에 더욱 담대히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이것은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관용과 동정을 베푼다는 선한 이름을 가졌다면, 가난한 자들이 궁핍할 때에 이렇게 말하면서 그에게 나아갈 것이다:”나는 그 사람에게 나아가겠다. 그는 선한 이름을 가졌고, 가난한 사람에게 선과 자비를 베풀며, 모든 사람들이 그가 후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 선한 이름이 가난한 사람들로 담대하게, 그리고 자주 그에게 나아오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그분의 이름으로 알게 되면, 그분께 담대히 기도로 나아갈 수 있다······만일 사람들이 그분이 자비롭고 선하시다는 것을 모르고, 그분의 아름다운 이름을 알지 못한다면, 그에게 나아올 수 없을 것이다. 그분에 대해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거나, 그분의 이름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면, 그분이 비록 자비와 진실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 해도 고난의 때에 그분께 나아가 기도하며 도움을 구할 마음이 전혀 없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잘 아는 자들은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은 기도하지 않는다. -니콜라스 본드(Nicholas Bownd, 1604).

1절.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이 말은 족장 야곱의 생애를 아름답게 언급하는 표현이다. 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야곱은 그와 함께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창 35:3). -존 모리슨.

1절.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히브리 원어의 뜻은 “너를 높은 곳에 두시며”이다. 여호와의 이러한 행동은 그분의 이름을 나타낸다:”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하나님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야곱도 이와 같은 곤란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창 32:6, 7). 둘째, 야곱도 같은 목적, 즉 구원의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목적으로 기도했다(창 35:3). 셋째, 그는 왕으로서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와 말씀하셨다(호 12:4). 넷째, “야곱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며, 이런 이름으로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근거로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 트랩.

1절.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당신이 수천 수만의 원수를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이름에는 당신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키며 당신이 끝까지 견디고 승리하도록 지키실 것에 대한 보증이 들어 있다. 그러나 당신은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나를 지킬 수 있느냐?”라고 물을 것이다. 한번 시험해 보라. 나는 여러 차례 시험해 보았다. 그러므로 나는 아는 것을 말하고 내가 본 것을 증거한다. 야곱의 하나님이 당신을 지키실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정말 어리석은 아일랜드의 천주교인을 만났다. 그는 무지하고 고집스런 사람이었는데, 신부가 성스러운 물을 한 방울만 그에게 떨어뜨려 준다면 야수가 득실거리는 곳을 돌아다녀도 그것들이 자기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내게도 한번 시험해 보라고 했다. 나는 이 시골 사람의 가증한 장난에 염증을 느끼고 나와 버렸다. 그러나 이 가련한 사람이 신부와 한 방울의 물을 이처럼 신뢰하는데, 나는 왜 어리석게도 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지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고서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내가 이 이름을 시험해 볼 때마다 나는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오 형제들이여, 언약의 피, 언약의 은혜, 언약의 약속을 누리라. 그리하면 “환난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리라.” -조셉 아이언스(Joseph Irons).

1절. “환난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슬픔에 잠긴 어린이에게 이보다 더 감미로운 소망과 위로를 주는 기도는 없다. 사람들 중에 고난의 날을 겪어 보지 않은 자가 어디 있으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는 동안 구름이 태양을 가리워 어두움의 길을 걸어 보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는가? 어떤 노인은 “사람은 고난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했다. 아담의 후손은 누구나 고난의 날을 맞이한다. 이러한 때 “환난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라는 말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이 기도는 한 사람이 고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위해 드리는 기도이며, 또한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드리는 기도이기도 하다. “환난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 -바르통 부시에(Barton Bouchier).

1, 2절. 믿음의 눈으로 이 구절을 살펴보라. 메시아는 환난날을 당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쏟아 놓는다. 메시아의 신부는 그분의 탄식과 신음 소리를 듣고, 함께 마음 아파하며 동정한다. 그녀는 그분과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그분을 붙드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기도한다······이제 그분은 고난에서 벗어난 듯하다. 그분은 높이 들림을 받고, 우리의 동정어린 기도가 필요치 않으신 듯하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는 그분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우리가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이는 곧 그분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시편 72:15이 이루어졌다:”저희가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저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저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그분의 고난받는 지체들을 위해) 종일 찬송하리로다(영광을 얻으신 그분께).” -해밀턴 버쇼일(Hamilton Verschoyle, 1843).

1-5절. 이 부분은 백성들이 그들의 왕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이다. 다윗이 백성들에게 바라는 대로 그들은 다윗을 위해 기도했다. 다윗은 백성들이 기도하기를 바랐고, 이것은 그들의 의무였으며, 그들도 이것이 자신들의 의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의무를 수행했다. 그들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이는 그들의 큰 잘못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나 자매 된 자가 우리에게 기도해 주기를 바라면, 우리는 이 의무를 다 수행해야 한다. 이 의무를 다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간에 헤어질 때에는 “나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인사하며 헤어지는데, 이것을 그저 인사말로만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를 부탁할 때는 진정 기도의 도움이 필요할 때 진실된 마음으로 부탁해야 하며, 이 부탁을 받은 자들은 기도로 그를 도와야 하는 것이다.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 특별히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며 도움을 청할 때는 신실하게 기도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 다윗도 그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이제 전쟁에 나가서 원수들을 맞아 싸울 것이며 큰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 시기는 다윗에게 있어서 “환난날”이었던 것이다······이처럼 기도 부탁을 하는 사람에게 기도로 돕겠다는 약속을 한 사람은 이 의무를 신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약속이란 우리에게 손해가 되어도 지켜야 한다. 하물며 우리에게 가까운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와서 그를 위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부탁해 달라고 했을 때,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하자. 그는 우리가 약속한 대로 행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이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속이는 것이 되며, 그의 기대하는 바를 좌절시키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와서 그를 위해 하나님께 말씀드려 주기를 바랐다고 하자. 우리가 그 약속을 들어 주기로 했다면 그는 큰 안심을 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우리가 게을러서 기도하지 않고 그를 속인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큰 잘못이다. 그가 이것을 알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 손에서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부탁을 받지 않았어도 예수께서 우리를 가르치신 것처럼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특히 우리에게 기도해 주기를 바라는 자들에게는 더욱 이름을 들어 기도해야 한다. 특별히 부모들은 기도 중에 자녀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녀들은 매일 부모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기도의 지원을 바라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겠는가?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 한다면, 그들도 또한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어느 교회에 한 존경받는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는 이제 잠들어 하늘 나라로 갔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분의 기도를 받고 싶어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도 부탁을 할 때면, 그는 언제나 “나를 위해 기도해 주게. 내가 기도할 때에 그대를 기억하도록 말일세”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기도의 도움을 받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먼저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 -니콜라스 본드.

1, 5절. 1절에서 시편 기자는 “환난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라고 노래했다. 그리고 5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그는 이 두 절에서 같은 시간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1절의 기도는 “환난날”에 드린 기도이며, 메시아께서 육신을 입고 계시던 때에 드린 기도이다. 5절의 기도도 역시 메시아께서 육신을 입고 계시던 때를 위한 기도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 구세주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그분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그들을 이 세상의 악에서 보호하시고,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처럼 그들도 함께 있을 것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분은 또한 자신을 죽일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다. 그분은 하늘에 오르신 후,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지금도 간구하신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시편 기자가 5절에서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은 메시아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던웰(F. H. Dunwell).

2절.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믿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진실된 믿음을 가진 자는 이 땅에서 도와줄 자가 아무도 없을 때에도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기도한다. 이것이 믿음과 불신의 차이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세상에서 그들을 도와줄 사람이 보일 때에 그들에게서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하면 다른 방법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에 잡히는 것만을 느낄 수 있는 소경과도 같다.

그러나 믿음은 먼 곳을 바라보고, 하늘까지도 바라보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본다. 이 하나님은 어떤 방법이든지 다 활용하실 수 있고, 아무것도 없이도 일을 하실 수 있으며, 아무것도 없는 데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믿음의 순교자 스데반은 원수들이 분노하고 그를 향해 이를 갈 때에도 하늘을 쳐다보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그를 변호하시고 지키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말씀의 약속에 대해 믿음을 가진 자들은, 땅에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할 때에 하늘에서 준비된 도움을 바라본다. -니콜라스 본드.

2절.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소”를 바라보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성소의 속죄소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성소 안, 속죄소에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곳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도우심과 힘을 주실 것을 믿음으로 기도한다. -데이비드 클락슨(David Clarkson).

2절.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들으시고 도움의 손길을 주신다. -존 트랩.

3절. “네 모든 소제······네 번제.” 아들이 아버지께 드린 “모든 소제”는 무엇인가?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그 겸손, 여인의 자궁에 거하신 그 인내, 비천한 출생, 딱딱한 구유에서 나시고, 소나 나귀와 같은 동물의 환영을 받으시고, 애굽으로 피신하시고, 나사렛에서 가난하게 사시고, 모든 선한 일을 하시고 악한 일을 참으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설교하며 가르치시고, 음식과 술을 탐하는 자라는 비방을 받으시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 불리우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여도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행한 것이라고 비난을 받으셨다.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 번제물이란 제물의 모든 부분을 불에 태우는 것이다. 남기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다.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온전히 고난을 받으셨다. 머리에 쓰신 가시 면류관, 손과 발에 박힌 못, 그분의 귀를 울리는 조롱, 죽어 가는 순간에도 그 앞에서 즐거워하던 군중들, 식초와 쓴 담즙, 사망과 죽음의 언덕에서 풍기는 역한 냄새. 밭을 가는 자들이 밭에 이랑을 파듯, 군인들은 그분의 등에 긴 홈을 팠고,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지극히 존귀하신 분의 뺨을 치고,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쳤다. 그분의 포도원을 위해서 이보다 더 받아야 할 고초가 무엇이 더 있겠는가?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사 5:4). 포도나무 되신 아들께서 받으셨던 이 모든 고초 외에 더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오 아버지여, 잊지 마소서. 우리 죄인들, 비참한 죄인들을 위해 바치신 이 “모든 소제”를 “기억”하소서. 죄를 지은 우리에게 영원한 심판을 내리지 마시고, 아무런 죄도 없으시고 입에는 궤사가 없으시던 그분의 “번제”를 받아 주소서! -닐(디오니시우스와 게르호후스의 말을 인용함).

3절. “받으시기를.” 이 구절은 히브리어로 하늘에서 불이 나와서 ‘재로 만들다’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증거이다. -매튜 풀.

3절. “네 번제.” 여기서 우리는 “번제”를 영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사랑의 불로 자신을 온전히 드리셨다. 또한 “네 번제”를 “네 모든 번제”라고 하는 것이 좋다. 번제란 번제물의 모든 부분을 불로 태워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그 모든 고난이 헛되이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겠다. 성령께서는 의인들에게 이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탄식하시며 가르치신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3절. “셀라.”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 말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말하는 “아멘”이란 뜻도 포함하고, 경탄하는 사람이 특별한 것을 나타낼 때에 사용하기도 하며, 이미 말한 것을 확증하는 의미로도 사용하고, 또한 이미 말한 것을 주의해서 생각하라는 뜻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음악 용어로서 쉼표를 나타낸다. -에드워드 마베리.

4절.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는 구세주께서 그분이 하실 일을 이루고자 간절히 소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의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 그분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의식으로 남겨서, 사람들이 이 의식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또 그들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강건하게 하기를 원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그 기뻐하시는 아들의 소망을 이루어 주셨다. -윌슨.

4절.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맺은 언약에서 아들이 받을 영광과 백성들이 얻을 구원에 대해 무엇을 약속하셨든지, 이것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존 길(John Gill).

4절.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어거스틴은 이 구절을 “응답하시기를 원하노라”로 해석했다. 네 뜻하는 바대로 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모하는 것도 이루어 주신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그 방법들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말이다. -존 트랩.

5절.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는, 그들이 얻는 구원의 기쁨에도 동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라는 표현이 나온다. -데이비드 딕슨.

5절.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외침은 사사 시대에 기드온을 따르던 자들이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외쳤던 것과 같은 외침이다.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자 하는 백성들이 이렇게 외치자 성이 무너졌다:”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수 6:20). 유다의 아비야 왕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했을 때에도 백성들이 외치고서 이스라엘 군대 오십만을 죽였다(대하 13:13-17). 지금도 군인들이 그들의 장군의 이름과 영광을 자랑하는데, 이는 원수를 대하여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것이다. 시편의 이 구절도 영적인 면에서 이와 같은 것을 나타내고 있다. -마르틴 루터.

5절.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고대에는 “기”가 군대의 장비에 속했는데, 이 기를 사용하여 전쟁 중에 사람들을 집합시키고, 인도하고, 구분하고, 군대의 사기를 높였다. 이 외에 다른 목적으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위로연을 베풀 때나 화려한 행진을 할 때, 특히 왕이 방문할 때에는 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순전히 상징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한다면, 당시 군대에서 하는 것처럼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를 세우고, 그분의 영광을 인정하고, 그분께서 호의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풍습은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 풍습이 유다로 전달되어 들어왔을 것이다. 터너(Turner)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수바(Soobah) 사람들의 풍습에 대해 들었다. 그들은 매월 언덕에 하얀 깃발을 꽂아 두고서 산으로 올라가 거기서 종교 행사를 가졌다. 그 땅의 신을 듀타(Dewta)라고 했는데, 그들은 보이지 않는 그의 환심을 얻고 축복을 받고자 했다. 그들은 듀타 신이 산의 정상에 머무르며 그가 원하는 대로 축복과 저주를 나누어 준다고 믿었다.” -사무엘 버더(Oriental Customs, 1812).

5절.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종교적 행사나 군인들의 행진에서 사람들은 기를 들고 다닌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마의 꼭대기나, 신전의 둥근 천장 위나 성문에, 또는 새 집의 지붕에는 그 종족의 기가 바람에 휘날리곤 했다. 인도의 시바 신은 하늘에 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조셉 로버츠(Joseph Roberts, Oriental Illustrations).

5절.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1)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며,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을 우리 싸움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을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입에서 조언을 구하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그분을 모시고 다닐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행위를 본받고,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할 것이며, 그분을 의지하고, 모든 일에 그분의 판단을 구할 것이다.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대항했다(삼상 17:45). (2)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승리를 자축할 것이다. 우리가 승리하여 “우리 기”를 세울 때에는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할 것이며, 우리의 승리에 대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것이고,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지 못할 것이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

5절. “우리 기를 세우리니.” 우리가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고백한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기로 삼는 것과 같다. 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런 고백을 더 분명하고, 더 순수하게, 더 열정적으로 한다면! 그렇다면 그들은 더욱 하나가 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더욱 용감하게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일에 더욱 성공적이 될 것이다. 기를 가진 군대는 무적의 군대가 될 수 있다(아 6:4). -윌슨.

5절. “우리 기.” 우리 기를 세운 장대, 기의 색깔, 그리고 기의 장식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장대는 그분의 십자가, 색깔은 피와 물, 그리고 펄럭이는 장식은 복음이요 세상에 이 복음을 외치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군대에서 기를 다는 막대는 십자가와 같은 모양이었다. 기를 다는 맨 끝은 십자가처럼 생겨서 그 끝에 기를 걸었던 것이다. 이것은 세상 나라들의 많은 군대들이 언젠가는 ‘십자가의 기’ 아래 모일 것을 예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의 모든 나라에서 군인들이 십자가의 기 아래로 모이는 날이 올 것이다. -마크 프랭크(Mark Frank, 1613-1664).

5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우편에 계셔서 그분이 받은 옆구리의 상처, 손과 발의 흔적을 보이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아이작 윌리엄스(Isaac Williams, 디오니시우스의 말을 인용함).

6절. “이제 내가 아노니.” “우리”라는 인칭 대명사가 “나”로 바뀌었다. 이렇게 해서 여러 사람이 드리는 기도가 마치 한 사람이 드리는 것처럼 표현하여 그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강조했다. “기름 부음받은 자.” 이 말은 여호와께서 그분을 왕으로 세우셨음을 말한다(참조. 시 2:2; 18:50). 어떤 사람은 “그 거룩한 하늘에서”라는 말을 “그분의 거룩하심이 있는 하늘에서”라고 해석했다. -토머스 윌콕스(Thomas Wilcocks).

6절.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성도들이 나를 위해 기도한다면 나는 매우 기쁠 것이다. 아! 아침이나 저녁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이 내 이름을 잊지 않고 기도한다면 나는 얼마나 기쁠까.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즐겁고 기쁜 일이다. 그분의 기도는 천상의 기도이며, 영광스러운 기도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이다. -아이작 암브로스(Isaac Ambrose, 1592-1674).

6절. “기름 부음받은 자.” 유대인들은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어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우리 구세주께서도 기름 부음을 받은 선지자로서 온유한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파하셨으며, 대제사장으로서 마음이 상한 자들을 치료하셨고, 왕으로서 포로 된 자들을 구원하셨다. 누구에게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그를 어떤 직임에 임명하는 것이므로, 주께 기름을 부어 중보자가 되게 하신 것은 적합한 일이다. 그분에 대해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히 1:9)라고 했다.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은사와 도우심을 말한다. 이것은 그분의 인성에 한정된 것이며, 그분의 신성은 온전하신 분이기에 그분의 신성이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신 그분 안에 인성이 있으므로, 그분은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것이다.

성경은 우리 주님께서 기름 부음을 받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을 강조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요일 5:1).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요일 2:22). 우리 구세주의 원수들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수들은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백하도록 했다:”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요 9:22). 그리스도는 그분의 임무를 다른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수행하셨다. 사도들이나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성령을 어느 정도 받았으나, 그분은 무한히 받으셨다. 그분은 다른 인생보다 아름다운 분이시다(시 45:2). 그분의 영광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했다. 그리고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은 그분의 충만한 데서 받으셨다. 아론이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었다. 아론이 받은 기름 부음은 그 옷깃까지 내렸다고 했다(시 133:2).

우리 구세주께서는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그래서 교회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3). 그분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 -존 후리온(John Hurrion, 1675-1731).

7절.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9월 말경에 난 무척 궁핍했다. 날씨도 좋아서 난 밖으로 나가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내 안에 믿음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내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의지할 자도 없지만 하늘과 땅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분은 우리가 궁핍한 중에도 평안한 마음을 주시지 않는가!” 그날 난 돈이 필요했지만, 난 믿음이 있었기에 기뻤고 또 용기도 있었다. 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는데, 집에서는 일꾼들을 감독하는 사람이 임금을 지불하기 위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게서 돈을 받아 임금을 치르고자 이렇게 물었다:”돈이 도착했어요?” “아니오. 하지만 난 하나님을 믿어요.”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마자 곧 어느 학생이 다가와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사람이 내게 전해 주라고 했다며 30달러를 내놓았다. 난 곧 방으로 들어가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에는 임금이 얼마나 필요하지요?” 감독은 “삼십 달러요”라고 했다. “여기 삼십 달러가 있어요. 더 필요하세요?” “아니오.” 우리는 이 일로 믿음이 무척 강해졌다. 우리가 돈이 필요했던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은 돈을 보내 주셨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기적의 손을 우리는 보았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헤르만 프랑케(Augustus Hermann Franke, 1663-1727).

7절.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악한 것을 의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사람들이 전쟁을 할 때면 병거나 말이나 함대나 군대의 수나 훈련 등을 의지한다. 그러나 강한 자가 전투에서 꼭 이기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강한 군대가 이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평화로운 시절에는 사람들이 재물이나 친구나 무역이나 농장을 의지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사람을 돕거나 구원하지 못한다. 자랑하려는 자는 하나님으로 자랑하라. -윌리엄 플러머.

7절.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면 그분의 여러 가지 특성이나 성품을 말한다. 이런 특성이나 성품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고 했다. 시편 기자는 그가 어떤 일을 하든지, 또는 어떤 환경에 처했든지 이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묵상하면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과 힘을 얻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의지했다:”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그러나 시편 기자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항상 만족하며 성공을 누렸다. 이 구절을 묵상하면 중요한 교훈과 진리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한 가지 특성이나 성품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것들이 모두 합쳐진 것이다. 그는 바로 이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억한다는 말은 그저 지나가는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상고하고 묵상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묵상한다면, 그 결과 우리는 즐거움과 확신을 누릴 수 있게 된다. -헨리 멜빌(Henry Melvill).

7절.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천주교도들에게 신부들이나 성자들, 그리고 성당에 걸려 있는 그림이나 우상들을 의지하도록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다. -윌리엄 아놋(William Arnot, 1858).

7절. “혹은 병거, 혹은 말······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 사람은 연약하기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을 신뢰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 속한 것들을 신뢰하고 추구한다. 어떤 사람은 병거를,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한다. 성도들은 이런 것을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이런 것들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 가운데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데이비드 딕슨.

7절. “혹은 병거, 혹은 말.” 병거와 말을 의지하는 자는 폭군처럼 다스리는 케사르를 왕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군대’는 폭군처럼 당신을 다스리지 않고 당신의 필요를 채워 줄 것이다. -아이작 윌리엄스.

7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 여호사밧은 유다의 모든 성읍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을 확립했다. 이전에 이미 여러 성읍에 군대를 두었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자랑하는 그때에야 주위의 이방 나라에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전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찰스 브래드버리.

7절. “혹은 병거, 혹은 말······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

어떤 사람들은 전쟁하는 말을 뽐내고

다른 사람들은 수많은 병거를 정렬시키네

그러나 우리가 자랑하는 것을 선포하리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자랑하네.

-리처드 맨트.

8절.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그들은 자신들이 신뢰하던 병거와 말에서 떨어져 땅에 엎드러질 것이다. 히브리 표현을 직역하면 “엎드려 경배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치명적인 상처를 받아서 더 이상 땅에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인의 손에 죽은 시스라의 죽음을 보라:”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삿 5:27).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정복자처럼, 우리는 두 발로 굳건히 서서 우리 땅을 지킨다. -매튜 풀.

[설교힌트]

이 시는 왕의 대관식이나 감사절의 설교에서 많이 사용된 본문이며, 이 중에는 왕에게 아부하는 엉터리 설교도 많이 있었다. 그 왕들 중에는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를 따르고 그에게 순종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설교를 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폭군을 성군이라고 부르며, 폭군 앞에서 쩔쩔맸던 것이다. -C. H. S.

시 20편 전체. 우리의 왕이신 예수를 위한 노래와 기도.

1절. 큰 환난 중에 얻을 두 가지 큰 자비-보좌에서 들으시고, 보좌에서 보호하심.

1, 2절. (1)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특징과 목표. (2) 주님께서 고난 중에 어떻게 하셨는가? (3) 예수의 고난을 수수방관하는 구경꾼이 되지 말자. -해밀턴 버쇼일.

1-3절. 친구를 위한 축복의 모델. (1) 경건한 삶을 축복한다. 축복을 받는 사람은 기도하고, 성소에 나아가며, 번제를 드리는 자이다. 우리 친구들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어야겠다. (2) 위를 바라본다. 여기에 나오는 축복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들이다. (3) 고난을 제외하지 않는다. (4) 이 축복들은 영적인 축복들이다.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의 용납, 하나님의 도우심 등.

2절. 성소에서 주시는 도움.

3절.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드리신 희생을 잊지 않으신다.

3, 4절. 사랑하는 자를 향한 4중 도움.

5절. 우리가 누릴 구원의 기쁨.

5절. “우리 기를 세우리니.” 하나님과의 동맹, 전쟁의 선포, 인내, 소유권 주장, 승리의 표.

5절 하반절. 주님이 드리는 기도의 능력, 그분을 통해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응답.

6절. 그분의 기름 부음받은 자. 우리 주님께서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언제? 어떻게? 무슨 사명을 위해서? 등.

6절.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우리를 위해 항상 기도하시는 주님.

6절.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 그분의 오른손에 있는 능력.

6절 상반절. “이제 내가 아노니.” 언제? 주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 영혼을 비출 때, 우리가 확신을 받을 때, 진리를 알 때 등.

7절. 피조물에 대한 신뢰는 외적으로 강하고, 효과적이고, 멋있고, 시끄럽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조용하고, 영적이고, 사람이 알 수 없다.

7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 참되신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특성과 성품을 묵상함.

8절.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난 일.

9절.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성경에서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박력 있는 기도.

9절 하반절. (1) 우리는 누구에게 가야 하는가? 왕에게. (2) 그분께 간다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분을 부른다. (3)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가? 우리의 부름을 듣고 응락하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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