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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뭇랍벤에 맞춘 노래〕. 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2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
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7/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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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시편 9. 9. 1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2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3내 원수들이 …
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4/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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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3(목) “시편 9:1-20” / 작성: 정한조
그리고 9편에는 표제어가 있는 반면에, 10편에는 표제어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9편과 10편의 내용이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
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4/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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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9 – 다국어 성경 Holy-Bible
시편 9편 ·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찌어다 ·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아니 …
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10/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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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편 & 성경주석 – BIBLE STORY
<시편 9편 서론>. 다윗의시, 영장으로 뭇랍벤에 맞춘 노래. 시 9편은 감사의 노래로 불려 왔다. 이 시는 악인들을 벌하시고 압제당하는 자들을 변호 …
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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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펄젼의 시편 9편 강해 – Daum 블로그
스펄젼의 시편 9편 강해 [개 요] 주제 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뭇랍벤에 맞춘 노래”이다. 이 머리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알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12/2022
View: 1957
시편 9,Psalm 9 KLB;NIV –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찬양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찬양 –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아들의 죽음’ 이란 곡조에 맞춰 부른 다윗의 노래) 여호와여, 내가 마음을 다하여 주를 찬양합니다.
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11/16/2021
View: 8541
[설교를 위한 단상] 시편 9편 1절 – 20절 나의 요새이신 하나님 …
개요 · 1. 시편 9편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셨음을 고백하며 그 은혜에 감사의 찬송을 올려 드리는 시이다. · 2. · 3. · 4. · 찬송가 183장, 빈 …
Source: otfreak.tistory.com
Date Published: 2/28/2022
View: 1778
매일말씀묵상. 4월 5일. 시편 9편. – 하늘품은교회
시편 9편. 네가 인생임을 알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라. 1. 9편은 승리를 노래하는 감사의 시입니다. 어떤 승리입니까?
Source: hapoom.or.kr
Date Published: 9/3/2021
View: 5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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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시편 9 편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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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1.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Mnp6R1Xnsds
시편 9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뭇랍벤에 맞춘 노래〕
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2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3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5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6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7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9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1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12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1)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13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14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5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16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힉가욘, 셀라)
17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18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19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20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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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2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3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5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6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7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9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1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찌어다
2018/05/03(목) “시편 9:1-20” / 작성: 정한조
본문 시편 9:1-20
찬송가 432장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심판의 찬미(1-8절)
오늘 본문 시편 9편과 내일의 본문인 시편 10편은 본래 하나였다가 2개로 나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로는 히브리어성경과 히브리어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성경> 그리고 <70인역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에는 모두 시편 9편과 10편이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9편에는 표제어가 있는 반면에, 10편에는 표제어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9편과 10편의 내용이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모두 22자입니다. 거의 2절씩 알파벳 순서대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한시(漢詩)는 끝자리의 운자를 맞추지만, 히브리 시는 첫 자를 맞추곤 했습니다. 시편 150편 중에는 알파벳 순서로 된 시편이 모두 8개가 있는데, 첫 시편이 9-10편이고,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119편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장입니다. 176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176절이, 8절씩 22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즉 시편 119편 1-8절까지 8절은 히브리어의 첫 알파벳인 ‘알레프’로 시작되고, 9-16절까지 8절은 히브리어 두 번째 알파벳인 ‘베트’로 시작됩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22번째 알파벳까지 하면 176절이 됩니다. 이러한 시를 ‘알파벳 시편’이라 부르기도 하고, ‘답관체 시편(Acrostic Psalm)’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시를 쓰는 이유는 시편을 좀 더 잘 외고, 가르칠 때에 편하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우리도 성경에 여러 가지를 외울 때 그와 같은 방법으로 하곤 하지 않습니까? 과거에 신학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입시공부를 할 때에, 사사시대의 12사사를 그와 같은 방법으로 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과 같이, 시를 그와 같은 방법으로 외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표제어가 라고 되어 있습니다. ‘뭇랍벤’이라는 단어가 시편에서 여기에만 나오기 때문에 그 의미를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뭇랍벤에서 ‘벤’은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의 막내아들의 이름이 ‘벤-야민’입니다. 그 뜻이 ‘오른손의 아들’입니다. ‘벤허’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는데 벤허가 ‘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뭇랍벤은 ‘아들의 죽음’이란 의미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NIV영어성경은 ‘아들의 죽음을 노래한 곡조를 따라(To the Tune of the Death of the Son)’라고 표제어를 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편은 어떤 배경으로 지어졌는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1-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다윗은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2가지를 결심을 합니다. 첫째는 ‘주님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둘째는 ‘지존하신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찬양과 경배’가 무엇인지를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역사(행하심)를 노래하는 것이고, 경배는 하나님의 성품을 노래하는 것이다.” 물론 노래한다는 것은 목소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은 다윗의 찬양과 경배가 되는 셈입니다.
크고 작은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제 치유자이십니다.”, 또 인생의 질곡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제 삶을 인도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형편없는 나에게도 한결같이 대해 주시는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이십니다.” 또한 내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경배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그 이유를 3-6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다윗이 드리는 감사와 기쁨의 이유는 원수들이 도망을 가다가 넘어졌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와 송사를 변호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의롭게 심판하신다고 신앙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해 주시며, 의로운 심판을 행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의 삶이 그만큼 정결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의와 송사를 변호해 주신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음을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앞에서 바르게 살려는 몸부림이 세상적으로는 재미없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지켜 줍니다.
또한 이방나라를 책망하시고, 그들의 이름을 지우시고, 주님께서 무너뜨린 성읍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은 출애굽과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을 치를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고, 사랑하심의 결과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무리 원하였더라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애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백성이 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홍해를 갈라주셨고, 그 바닥을 마른 땅과 같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광야 40년 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고,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역사해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는 때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노예였기 때문에 군대를 조직하거나,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가나안 땅을 차지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조상 이스라엘 자손들이 성읍을 무너뜨렸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9-20절)
다윗이 하나님에 대해서 9-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오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압제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요새가 되신다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의 칼을 피해 도망을 다닐 때에 하나님께서 요새가 되심을 깊이 체험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전쟁이 발발하면, 전후방이 따로 없고, 높은 곳 낮은 곳이 따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투기로 공격을 하거나 대포나 미사일을 날리면 높은 곳에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대에는 달랐습니다. 높은 곳의 요새는 전쟁에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참된 요새는 자연 지형에 만들어진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체험적으로 깊이 압니다. 시편 27:10에서 다윗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이 자기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적은 없지만, 혹 그런 처참한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13-14절에서 이렇게 이어집니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다윗은 자신이 대적자들로 인해서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었지만, 하나님의 이끌어주심과 건져올려주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귀신이 들려 점을 치던 소녀를 고쳐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감사와 박수가 아니라 심한 매질과 감옥에 갇힘이었습니다. 그 때에 바울과 실라는 그 속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사도행전 16:2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참 억울합니다. 바울 일행은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감옥 안이었습니다. 그것도 깊은 감옥이었습니다. 그 때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였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찬송을 드렸다는 것은 빨리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찬송은 그런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 상황에서 찬송을 드렸다고 하는 것은, 그 상황을 진심으로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상황이 어렵고 힘들어도, 그 상황으로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진심으로 수용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옥문을 열어주셨고, 간수의 마음의 문도 열어, 그 집안에도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시편은 악인의 심판을 기원하며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19-20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지금 다윗의 기원처럼 시편에는 시인이 하나님께 악인을 벌해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내용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시인이 처한 상황이 악인으로 인해서 그만큼 처절하고 고달프고 힘들다는 의미로 수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하소연을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해 고통스럽다며 비명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욥의 친구와 같이 됩니다. 내가 가진 믿음의 틀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신앙의 전부는 결코 아닙니다.
또한 그 기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고백으로 드리는 것으로 받아야 합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쿠데타를 당하여 도망을 가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신발도 신지 못하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눈물을 삼키며 감람산으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은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시편 3:1절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고서도 압살롬과 그와 함께 한 무리들을 내 손으로 해치우겠다고 달려나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 맡기겠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사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던 시절에도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2번이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한번은 겉옷자락만 가만히 베고, 또 한 번은 머리맡에 있던 병과 칼만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믿음의 태도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이해가 되는 일도 많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또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그런 때에도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역설의 진리의 삶을 살게 될 때에, 우리가 삶으로 쓰는 시편은 우리의 인생 지도를 은혜와 섭리의 지도를 그려가는 믿음의 색종이가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은총의 현장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하나님이 없이도 인생을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과 오만함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가장 복되며, 우리의 매일매일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가장 가치가 있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매 순간은 하나님의 행하심이 이해가 되지 않아 실망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 같아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과 인도하심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다 쌓은 후에, 수문 앞 광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를 수문 앞 광장으로 만들어, 그곳에서 역설의 진리의 삶을 살아갈 뿐 만 아니라, 매일 나의 시편을 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그런 은총 속에 살아가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가까이 하고,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취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습니까?
2. 당신은 최근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올려드린 찬양과 경배는 무엇이었습니까(목소리로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삶으로 드리는 것도 포함하여)?
3. 당신이 최근에 통과해야 했던 삶의 질곡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 과정을 어떻게 견뎌내고 이겨내셨습니까?
4. 오늘도 하나님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 자기를 부인하고 역설의 진리의 삶을 구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시편 9편 & 성경주석
<시편 9편 서론>
다윗의시, 영장으로 뭇랍벤에 맞춘 노래.
시 9편은 감사의 노래로 불려 왔다. 이 시는 악인들을 벌하시고 압제당하는 자들을 변호하시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오직 한 절(13절)만이 불길한 음조로 이 노래 전체에 흐르는 승리의 선율을 차단한다. 이 시는 답관체 시들, 곧 알파벳의 순서에 따른 시들 중 첫 번째 것이다. 하지만 이 시의 답관체 형식이 이 형식으로 지어진 다른 몇몇 시들에서처럼 엄격히 적용되지는 않았다. 첫째 연의 각 행이 히브리 철자의 첫 글자인 알레프(’alep)로 시작한다. 그 후에는 단지 각 연의 첫째 행만이 이 법칙을 따르고 있는데, 그것마저도 이 법칙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매우 규칙적으로 구획된 이 시는 동일한 길이로 된 열 개의 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에서는 답관체 시들에서 통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상을 형성하는 데 어떤 두드러진 진전이나 연속성은 없이 그저 그 사상이 여러 다른 측면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기만 한다. 이 시에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에도 어떤 사람들은 삼하 8장이 이 시가 지어진 적절한 배경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몇몇 히브리어 필사본들과 「70인역」 그리고 「불가타역」에는 9편과 10편이 하나의 시로 되어 있다.
* 뭇랍벤(Muth-labben) : 의미는 모호하다. 어떤 히브리 필사본들은 무트(mut) 앞에 “위에”(「제임스왕역」)로 번역되는 알(‘al)을 결합해 알무트(‘almut)라고 한다. 그러나 이 복합어도 설명할 수 없는 전문용어이다. 「70인역」은 이 복합어를 따라 알무트 랍벤(‘almut labben)이라고 번역했는데 이 의미는 “아들의 감추어진 것들에 관하여”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이 어떤 음조의 명칭이거나 첫 구절이며 “아들을 위하여 죽다”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편 9편 성경주석>
9:11. 전심으로.
매우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시가 시작된다. 이 시에서는 애정의 분열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더 나아가 그의 감사의 표현은 그저 입술로만 하는 표현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는 표현이다.
9:1 주의 모든 기사를.
시인의 찬양의 직접적인 주제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복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 3~5절에 하나님의 특정한 개입이 언급되어 있다.
9:2 지극히 높으신.
히브리어 엘룐(‘Elyon). 참조 시 7:17 주석.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분이다.
9:2 찬송하리니.
히브리어 자마르(zamar), “시”를 의미하는 미즈모르(mizmor)라는 명사의 어근. 자마르에는 “노래하다”와 “악기를 연주하다”의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 있다.
9:3 주의 앞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원수는 엎드러진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승리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9:4 나의 의와 송사.
하나님은 의로운 송사를 변호하셨다. 그는 변호자이다.
9:4 앉으사.
보좌에 앉아서(참조 7절) 송사의 시시비비를 결정하는 재판장의 모습에 대한 묘사이다. 그의 판결은 시인의 편을 든 판결이다.
9:5 열방.
(「제임스왕역」에는 “heathen”[이방]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히브리어 고임(goyim), “나라들”(참조 시 2:1 주석).
9:5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어떤 민족이 정복당하면 이 땅에 있는 나라들 중에서 그 이름이 존속되지 않는다.
9:6 원수.
이 절의 첫 행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원수-그들은 소멸될 것이다-곧 영원한 황폐”이다. 이 절은 원수의 완전한 멸망을 묘사한다.
9:7 여호와께서.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헴마(hemmah)와 더불어서 6절이 끝을 맺는다. 이 단어는 “그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 말이 문맥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번역판에서 이 단어를 번역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가릿어에서 헴마가 “보라”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참조 68, 69쪽). 만약 헴마가 여기서 그 같은 의미로 쓰였다면 이 단어는 7절의 맨 앞에 위치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되면 7절의 앞부분이 “보라,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가 된다. 시인의 시대에는 쓰이지 않던 구두점을 헴마의 뒤가 아닌 앞에 찍으면 이 시의 답관체 형식이 보강된다. 이 같은 조정은 7절을 히브리어 철자 헤(he)로 시작하게 만든다. 현재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9:7 앉으심이여.
(「제임스왕역」에는 “shall endure”[지속할 것이다]로 되어 있음-역자 주). 문자적으로 “앉다.” 6절의 멸망과는 전혀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공정한 심판을 행하면서 영원히 그 재판석에 앉아 계신다. “만상이 변하고 쇠퇴함을 보오니 오, 변치 않는 당신이시여, 나와 함께하소서!”
9:8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참조 계 20:12, 13. 하나님은 이 시의 배경이 되는 사건에서 자신을 의로운 재판장으로 드러내신 것처럼 마지막 심판에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넷째 연을 구성하는 7절과 8절은 답관체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9:9 산성.
히브리어 미스가브(misgab), “안전한 고지(高地).” 참조 시 18:2; 46:7; 48:3.
9:10 주의 이름을 아는.
참조 시 5:11; 7:17 주석.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은 그의 품성을 익히 아는 것을 의미한다.
9:10 의지하오리니.
하나님은 율법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행위의 공정성을 신뢰할 수 있는 분이다(참조 시 62:8; 64:10; 111:5).
9:10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의 자녀들을 버리지 않는다.
9:11 시온.
참조 시 2:6 주석; 시 3:4; 5:7.
9:11 찬송하며.
시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의 인자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와 함께 그를 찬양할 것을 요청한다.
9:11 백성 중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열방에 선포됨으로 그들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또한 그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참조 시 105:1). 이 사상은 시편 전체에 흐르는 사상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 교훈을 깨달았다면 바리새인들이 행한 완고한 배타적 행위들은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9:12 심문하시는.
“심문하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가 “찾다”로 번역된 창 9:5을 참고하라. 하나님이 죄 있는 자들을 벌하러 나아오는 형집행자로 묘사되어 있다. 하늘의 관점에서 볼 때 살인은 극악한 범죄행위이다. 피의 보수자인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일을 간과하실 수 없다(참조 창 4:10). 그는 이스라엘의 최근친이며, 무죄한 피흘림에 대하여 복수하기로 서원하였다.
9:12 가난한.
다시 말해서 “고통받는.”
9:13 사망의 문.
히브리인들은 사망을 죽은 자들의 상징적인 거처인 셔올(s∨e’ol)과 연관시켰다. 시적인 영상에서 이 셔올은 문들이 있어서 그 출입이 통제되는 장소로 여겨졌다(사 38:10). 바벨론적 개념에서는 셔올이 죽은 자들을 가두어 놓는 성읍이었는데, 이 성읍은 그들이 산 자들의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빗장이 이중으로 된 일곱 개의 문이 있는 칠중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인은 자신이 사망의 문에 너무나도 가까이 이르러 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를 거기에서 건져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지금 그가 처해 있는 위험 중에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분을 바라본다. “사망의 문”이라는 구절은 시 107:18에도 나온다. 시 9편 전체에서 오직 13절에서만 연속적인 승리의 선포가 중단된다.
9:14 전할 것이요.
죽은 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기 때문에(시 88:10~12; 115:17) 시인은 산 자들 중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그에게 청한다.
9:14 딸 같은 시온.
(「제임스왕역」에는 “daughter of Zion”[시온의 딸]로 되어 있음-역자 주). 예루살렘의 거민들. 시온 곧 예루살렘은 모성(母城)으로 여겨졌다. 여기와 위의 11절에서 “시온”이란 이름이 나오는 것은 이 시가 시온 곧 예루살렘이 나라의 수도와 예배의 중심지가 된 후에 지어진 시임을 보여 준다.
9:14 문.
“사망의 문”(13절)과는 대조적으로 이 문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소식을 나누는(고대에 일간 신문 같은 역할을 함) 성읍의 입구에 위치해 있는 문이었다. 그곳은 (헬라인들의 아고라나 로마인들의 포룸처럼) 어떤 소식을 널리 알리기에 편리한 장소였다.
9:15 열방.
(「제임스왕역」에는 “heathen”[이방]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시인을 향하여 포진하고 있는, 우상을 숭배하는 열방들(참조 시 2:1; 9:5 주석).
9:15 웅덩이에.
이 구절과 다음 구절은 시 7:15과 동일한 사상을 표현한다. 포획 놀이의 두 가지 방식이 여기서 비유적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 사상이 아래 16절에서 다시 되풀이된다. 이 형벌은 그 범죄에 적합한 형벌이다.
9:16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열방의 해악이 그들 자신들의 머리로 되돌아가도록 함으로 하나님이 그의 구원하는 능력을 만민 앞에 드러냈다.
9:16 그 손으로.
참조 15절; 시 7:15.
9:16 힉가욘.
이 단어는 이곳 말고 다른 곳에서는 “묵상”으로 번역된 시 19:14과 “정숙한 소리”로 번역된 시 92:3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는 뜻이 모호하다. 또한 이 시의 이 지점에서 왜 이 말이 첨가되었는지를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이것은 음악적 음향 또는 공적인 연주 때의 막간을 표시하는 것일 수 있다.
9:17 돌아감이여.
문자적으로 “돌아갈 것이다.” 동일한 히브리어 동사가 3절에서는 “물러가다”로 번역되어 있다.
9:18 궁핍한 자.
이 단어와 이 절의 후반부에 나와 있는 “가난한 자”라는 단어는 빈곤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압제의 희생자들까지도 의미한다(참조 12절 주석). 궁핍하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은 구약의 위대한 진리들 중 하나이다.
9:18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17절의 “잊어버린”이라는 단어에 대한 말놀이. 하나님은 그의 구원과 보호가 필요한 자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9:18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구원에 대한 열렬한 소망을 의미한다. 가난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이 항상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9:19 여호와여 일어나사.
시인은 하나님께 이 땅의 심판자로서 그의 자리에 앉으시라고 엄숙하게 호소한다(참조 시 3:7 주석)
9:19 인생.
히브리어 에노쉬(’enos∨). 힘있는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약하고 무력한 모습의 “사람”을 가리킨다(참조 시 8:4 주석).
9:19 목전.
히브리어 파네(paneh), 문자적으로 “얼굴.” 우가릿어(참조 68, 69쪽) pn도 얼굴을 의미하긴 하지만 이에 더하여 “뜻” 또는 “목적”이라는 의미와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실례를 아마르나 편지에 사용된 가나안어 파누(pa
nu)에서 찾아볼 수 있다(참조 제1권, 116~118). 따라서 여기와 다른 몇몇 구절들(이 단어가 “진노”로 번역된 시 21:9, “면책”으로 번역된 시 80:16, “낯”으로 번역된 시 82:2)에서는 파네(paneh)가 “뜻”으로 번역되는 것이 옳은 듯하다. 이같이 번역하면 이 본문은 “열방으로 주의 뜻을 따라 심판을 받게 하소서”가 된다.
9:20 두렵게.
히브리어 모라(morah). 이 단어는 그 자음의 구성이 “선생”을 의미하는 단어와 동일하다. 「70인역」과 「수리아역」은 이 독법을 따른다. 어떤 번역판들은 모라(morah)를 모라(mora’), “두려움”의 철자를 잘못 쓴 것으로 간주한다(「제임스왕역」, 「개정표준역」). 또 다른 이들은 이 단어를 므에라(me’erah), “저주”의 철자를 잘못 쓴 것으로 본다. 이 경우에는 이 구절이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다”로 번역된다.
9:20 인생.
히브리어 에노쉬(’enos∨). 19절에 나온 것과 동일한 단어. 이 시는 온 땅의 심판자의 눈에 비친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강조로 끝을 맺는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6권
paul lee
[개 요]주제
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뭇랍벤에 맞춘 노래”이다. 이 머리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것은 윌콕스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시편을 노래할 때에 따른 곡조를 말할 수도 있고, 당시에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것이지만 이제는 알 수 없는 악기를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은 역대상 15:18에 나오는 것처럼 레위족으로서 노래하는 자인 벤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이 추측이 옳다면 “뭇랍벤”과 관련된 머리말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는 없고, 단지 다윗이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 의식을 질서있게 행하도록 했다는 것만 알려 줄 뿐이다.
이런 머리말에 억지로 의미를 붙여서 이상하게 해석하지 않아도,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참조하면 여러 가지 유익한 교훈들을 받을 수 있다. 이 시는 아들의 죽음에 관한 시이다. 히브리어 성경의 아람어 역본에는 “두 진 사이에 나갔던 장군의 죽음에 대해”라는 구절이 적혀 있는데, 이는 골리앗이나 다른 블레셋 사람을 가리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수가 죽은 지 수년이 지난 후에 다윗이 여기에 대해 시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이 시를 짓게 된 상황에 대해 수많은 추측들이 있지만, 이 주장이 시의 내용과 일관성이 있어서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렇게 해석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악의 대장, 우리 영혼의 원수(6절)를 이기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시는 승리의 노래이다. 이 시가 악과 투쟁하는 성도들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붙들어 주기를 바란다. 또한 소극적이고 마음이 약한 성도들은 이 시에 나오는 정복자, 옷과 다리에 “만 왕의 왕, 만 주의 주”라고 기록된 그분을 보면서 용기를 얻게 되기를 바란다.
시편의 순서에 대해 보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각 시편이 구성된 순서를 보면 종종 서로 연관이 잘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있는 시편의 순서가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순서인지, 아니면 에스라와 같은 후기의 편집인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정경 속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하고 내용과 순서를 모두 조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여기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기 전에, 시편의 순서는 정경이 완성되었던 시기만큼 고대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만일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시편이 현재 배열된 순서를 따라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지기를 바라셨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시 7편의 마지막 절에 이어서 8편이 시작되고, 9편은 8편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참조. 아 1:4; 계 19:7)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시 9:1, 2).
시 8편에서는 “주의 이름”이 아름답다고 찬송했다. 마치 이 노래가 아직도 이스라엘의 노래하는 자의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이름”을 찬송하며 시 9편을 시작한다. 또한 10절에서도 “주의 이름을 아는 자”가 주를 신뢰한다고 노래하는 것이다.
구성-이 시는 노래의 가락이 계속해서 바뀌기 때문에, 시의 구성을 인위적으로 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구성을 염두에 두면 이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6절기쁨에 찬 감사의 노래.
7-12절미래에도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계속해서 선포함.
13-14절기도로 첫번째 부분을 마침.
15-16절과거의 심판에 대한 노래.
17-18절미래에 공의가 있을 것에 대한 신뢰를 선포함.
19-20절마치는 기도.
이 시를 읽으면서 구세주의 승리를 축하하자.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는가!
[강 해]1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2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3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4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5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6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1절.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노래하는 자는 거룩한 결심과 함께 찬양을 시작한다:”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우리가 원수를 앞에 두고, 원수의 이빨 사이에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을 요하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해도 그분을 찬양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시편 기자는 원수들이 철저하게 멸망당할 것을 본다. 그리고 기쁨 가운데 노래를 부른다.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이 의무를 특권으로 여기고 행하자. 다윗이 오직 여호와만을 찬양한 것에 주의하자. 찬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 우리가 도움을 받은 자들에게 감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내가 전심으로.” 마음을 절반만 드리는 것은 온전한 마음이 아니다.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데에 참된 찬양이 있다. 이것은 경건한 자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의 주제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은혜와 자비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일이 아니다.
“주의 모든 기사.”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한 가지라도 기억하면 다른 수천 가지를 새롭게 기억하게 된다. 은사슬의 고리 하나 하나가 서로 엮어져서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기억들을 불러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원히 행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사랑은 영원토록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죄인이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혹은 우리 안에서 행하신 그 모든 일들, 즉 보존, 용서, 회심, 구원, 성화 등과 같은 일들이 놀라운 “기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늘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이 은혜는 하늘에 들림을 받는 것만큼이나 우리에게 놀라운 주제가 될 것이다.
2절.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미하는 자는 기쁨과 즐거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새들도 기쁨이 넘치는 곡조로 조물주를 높이고, 가축들도 기쁜 소리로 행복감을 표현하고, 물고기들도 기쁨을 이기지 못해서 수면 위로 뛰어오르며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가? 몰록을 섬기는 자들은 고통으로 소리 지르며 경배하고, 저거노트(Juggernaut)는 사람의 고통과 탄식 소리를 듣기 좋아하지만, 사랑의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거룩하고 명랑한 웃음, 성화된 기쁨을 좋아하신다. 날마다 기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빛나게 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입어야 할 아름다운 의복과 같다. 하나님은 기쁨으로 드리는 예물을 좋아하시는데, 이것은 지갑에서 나오는 예물이든 입술에서 나오는 예물이든 마찬가지다.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노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것이다. 우리가 찬송을 아무리 많이 불러도 다함이 없고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찬송 소리 듣기를 기뻐하신다. 파워는 이렇게 말했다:”선원들은 닻을 내리며 기뻐 외치고, 농부들은 아침에 밭을 갈면서 휘파람을 불고, 우유 짜는 아가씨는 아침에 일을 나가면서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군인들은 친구들을 뒤에 두고 가정으로 돌아오면서 장송곡이 아니라 빠르고 경쾌한 노래를 부른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은 이처럼 노래를 불러야 한다. 찬양하는 자들에게는 아름답고 열매 맺는 삶이 열린다. 우리 앞에 어렵고 험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찬양하면서 이겨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지치고 피곤해져서 우울한 마음을 갖게 되면 이러한 어려움을 감당할 수 없으며, 이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두 배나 더 힘을 쏟게 된다. 사울 안에 있던 악한 영이 다윗의 수금 소리를 듣고 잠잠해졌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때에 우리 안에 있는 우울한 영이 우리를 떠나게 된다.”
3절. “내 원수들이······넘어져 망함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우리의 원수가 아무리 난폭해도 망할 수밖에는 없다. 여호와께서 손을 드시고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면 그들은 철저하게 망할 수밖에 없다. 도망을 쳐도 소용이 없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추적하시는 날, 그들이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이때에 우리는 다윗처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여호와께서 함께하셨기에 원수들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수를 이기신 대장께서 기뻐 웃으신다면, 이 구세주의 승리와 기쁨을 우리의 승리와 기쁨으로 삼아야 한다. 구세주의 원수가 철저하게 패배한 것을 보고서, 우리는 구세주와 함께 기뻐해야 한다.
4절.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어떤 사람은 “내가 그것을 지키리라”를 그들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더 좋고 겸손한 좌우명을 가지고 있다:”주께서 지키셨습니다.” 하나님과 나의 송사/권리는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나는 내 권리를 결코 잃지 않는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려 한다면, 우리는 오해와 수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 보좌에 계시고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무지하고 무정한 자의 박해에 맡기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5절.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하나님은 멸망시키기 전에 꾸짖으신다. 그러나 그분이 악인에게 심판을 시작하시면 그들을 산산조각을 내기까지 하시며, 악취 나는 찌꺼기를 버리는 것처럼 그들의 이름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하신다. 1-5절에서 “주”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 헤아려 보라. 맑은 날, 제단에서 화제를 드리면 향기로운 연기가 하나님께 올라가듯, 감사가 여호와께 올라가는 것을 보여준다. 나를 구원하셨고, 지금도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내 영혼이 감사를 올리는 것이다.
6절.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이제 시편 기자는 원수가 도말된 것에 대해 뛸 듯이 기뻐한다. 엎드러진 원수를 굽어보면서 그가 뽐내며 자랑하던 힘을 비웃는 것이다. 뽐내며 교만하던 원수들의 입에서 노래를 뽑아 내 그 노래로 원수들을 비웃는다. 의인을 핍박하며 놀리던 원수에게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놀리며, 사망과 무덤에게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라고 비웃는다. 이제 황폐케 하던 자가 황폐하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을 포로로 잡아가던 자가 이제는 자신이 포로로 끌려간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그들의 왕을 맞이하라. 탬버린과 하프로 노래하며 왕께 경배를 드릴지어다.
7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8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9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10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1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12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 보면, 미래가 두렵지 않다. 우리를 구원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능력의 보좌에 계시니, 우리는 그분을 의지하고 언제든지 평안한 마음으로 기뻐하며 노래할 수 있다.
7절.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히 계시고, 그분이 영원히 통치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이다. 원수는 결국 ‘영원히 멸망당할 것’이며, 하나님과 그분의 보좌는 ‘영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주권자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가 된다.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심판을 위해 예비한 보좌에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속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늘의 법정에서는 원고들이 판결을 기다리느라고 지치는 일이 없다. 하늘에 계신 왕의 법정에서는 어느 때고 재판이 열린다. 수천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법정에 몰려와도, 재판장께서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불평할 일이 없다. 그분은 어느 때고 사람들의 진술을 들으시고 공평하게 판결하신다.
8절.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사람들의 법정이야 어찌 되었든지, 하늘 보좌에서는 공의로 심판한다. 편견이나 특혜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의로 판단하시는 위대한 왕의 법정에 설 것을 생각하라. 죄를 짓고자 유혹을 받을 때에 삼가게 될 것이고, 압제나 비방을 받을 때는 위로가 될 것이다.
9절.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 마지막 심판의 날에 악인에게 어떤 기업도 허락지 않으실 그분이 이 땅에서 고난을 받는 의인에게는 보호와 산성이 되신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의 압제가 있다. 우리는 사람과 사탄에게서 모두 압제를 당한다. 그리고 이 모든 압제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신다. 율법 시대에도 도피성이 있었다. 복음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피성이 되신다. 바다에 태풍이 일면 배가 항구를 찾아가듯,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압제를 받게 되면 공의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날개 아래 피한다. 그분은 난공불락의 산성이시며, 지옥의 군대가 폭풍으로도 공격할 수 없다. 그리고 높은 곳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저 아래에 있는 원수들을 조소하며 바라볼 것이다.
10절.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최악의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지식을 갖는 것은 최상의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믿음을 갖게 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아! 하나님의 성품을 더 알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그 빛 가운데서 불신의 악심을 품을 수 없다. 불신이란 마치 밤에만 다니는 올빼미처럼, 위대하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빛 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에는 영광스럽고 충만한 확신이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설교 힌트’를 보도록 하라.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체험은 영혼의 닻 같아서 시련과 고난의 시간에도 영혼으로 방황하지 않게 한다.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잠시 동안 그분의 백성들에게서 얼굴을 숨기실 때도 있으나 철저하게, 최종적으로, 진심으로, 분노 가운데서 그분을 찾는 자를 버리신 것은 아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여기서 위로를 받으라. 하나님을 만난 자는 더욱 즐거워하라. 하나님은 그분을 찾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분의 성실하심을 알게 하신다.
참회하는 자들의 소망이요
겸손한 자들의 기쁨이시네
넘어진 자에게 당신은 얼마나 친절하신지
당신을 찾는 자에게 또 얼마나 좋으신지.
당신을 찾는 자의 기쁨을
말과 글로도 다 표현할 수 없네
예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그분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안다네.
11절.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시편 기자는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선언했던 것처럼(1-2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고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은 전염성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움직여서 그와 함께 찬송을 드리게 하기까지는 만족함이 없다.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찬송하는 것과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하나로 묶어 놓았다. 복음 사역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말씀 중심으로 종교 개혁을 이루었던 루터는 많은 시와 찬미를 썼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와 찬미를 불렀다. 현대의 부흥 운동을 일으켰던 존 웨슬리(John Wesley), 휘트필드(Whitfield),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케닉 베리지(Cennick Berridge), 토플레디(Toplady), 하트(Hart), 뉴턴(Newton),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사람들도 찬송을 통해 영성을 회복했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선포하시며 나타나시는 은혜스런 봄이 되면, 찬양하는 새들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형제들이여, 노래하라. 그리고 말씀을 선포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거하신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가 시온에 오르면서 기억할 것이 있다. 여호와께서는 성도들 중에 거하시고, 그분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특별한 경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12절.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압제하는 자의 피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문하실 때, 하나님은 맨 먼저 순교자를 기억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택하신 자들의 신원을 들어주신다. 살아 있는 성도들의 탄원도 들어주신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들에 대해서 결백하다는 증거를 받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가장 격렬한 심판을 행하시는 도중에도 파멸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살륙하는 자가 여호와의 원수들을 치도록 허락을 받기 전에, 먹을 가진 자들은 성도들이 해를 받지 않도록 표를 할 것이다. 겸손한 성도들이 부르짖는 소리는 천둥처럼 울리는 공의의 소리나 저주받은 자의 비명에 묻혀 버리지 않을 것이다.
13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14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지난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미래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을 확신한 성도는 이제 현재 당하는 고난 중에서 자비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필요한 것을 간구하고 있다. 그는 모든 시간을 찬양과 기도에 전념하고 있다. 어떻게 이보다 더 귀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겠는가?
13절.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가 드리는 첫번째 기도는 모든 사람이 어떤 경우에 드려도 적합한 기도이다. 이 기도에는 겸손한 마음이 나타나 있고, 자신을 알고 찾아가야 할 분을 찾아가서 드리는 기도이며, 그분의 성품에 근거하여 드리는 기도이다. 이 기도에는 기도의 핵심과 골수가 들어 있다. 그래서 이 기도를 작은 “기도책”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기도는 작은 것에 많은 것이 들어 있으며, 천사의 칼처럼 위력이 있다. 이 기도의 사다리는 짧은 것처럼 보이지만, 땅에서 하늘까지 다다른다.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이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찬사인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구원인가! 우리가 병들었을 때나 죄 가운데 빠졌을 때, 절망 가운데 있을 때나 유혹에 빠졌을 때, 우리는 지극히 깊은 곳으로 떨어졌고 그 깊은 곳에서 사슬에 묶일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 밑에는 영원하신 팔이 있었고, 그 팔에 안겨 우리는 하늘의 문에 이르도록 올려졌다. 트랩은 이처럼 말했다:”그분의 팔은 죽은 자를 들어올리기 위한 팔이며, 자신의 무덤을 이야기하는 자들을 구원하는 팔이다.”
14절.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목적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하나님의 찬송을 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한다. 성도들은 자신만을 바라보는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이 자비의 다이아몬드를 바라는 것은, 이 다이아몬드가 빛을 발하고 반짝거려서 이처럼 고귀한 보석을 자신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그분을 경배케 하기 위한 것이다.
“딸 같은 시온의 문.” 사망의 문과 새 예루살렘의 문은 지극히 대조적이다. 우리가 어떤 곳에서 어떤 상태로 구원받았는지를 기억하고 마음을 다하여 즐거운 노래를 가장 높은 목소리로 하나님께 올려보내자. 이런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분의 자비를 간구하는 기도를 더욱 간절히, 그리고 아픈 마음으로 드리자. 다윗이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라고 했을 때, 그는 깊은 곳, 즉 사망의 문에 떨어졌던 것과 높은 곳, 즉 시온의 문으로 구원받은 은혜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우리 찬송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오! 구세주의 사랑, 그 깊이와 넓이!
예수여,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당신의 자비는 한없이 높고,
측량할 수 없는 깊이를 내가 체험했네.
여기에서 이 시의 첫번째 부분이 끝난다. 잠시 쉬면서 느끼는 바는 우리가 이 시를 겉만 핥았을 뿐이요, 그 깊이를 파헤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구절 구절마다 교훈이 가득하다. 성령께서 독자들을 축복하셔서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
15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16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
15절.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원수들을 심판하시되, 철저히 심판하신다. 이 무서운 심판의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 말로 번역되지 않은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가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힉가욘, 셀라.”
16절. “힉가욘, 셀라.” 묵상하며, 잠시 멈추라. 생각하며, 악기를 연주하라.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본문의 내용에 부합하는 엄숙한 마음을 갖도록 하자. 우리 모두 겸손한 마음을 갖자.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배우자.
첫째, 하나님의 성품은 죄에 대한 심판을 요구하신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이 구절에는 그분의 거룩하심, 그리고 죄를 혐오하심이 잘 나타나 있다. 세상의 군주가 악을 좋아했다면, 그의 악이 심판의 날에 드러날 것이다. 반면에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되리라. 우리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한, 그분은 범죄자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오직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한 가지 예외가 있을 뿐이다. 이는 그분도 의로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둘째, 그분께서 심판하시는 방법은 지혜롭고, 아무도 시비를 걸 수 없이 공의롭다. 그분은 악인이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게 하신다.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교활한 사냥꾼처럼 그들은 경건한 자가 빠지도록 함정을 쳐 놓았으나, 그 함정에 자신들이 빠지고 말았다. 잡으려고 했던 자는 그들의 덫을 벗어났으나, 악인이 만든 함정의 효과는 대단했다. 그 함정은 그것을 만든 자를 덫에 걸리게 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고 압제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악의에 찬 계획에 희생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정뱅이들이 자신을 죽이는 법이다. 탕자는 거렁뱅이가 되게 마련이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자는 자신을 황폐하게 한다. 사악한 자는 맹렬한 질병에 먹힌다. 질투하는 자는 자신의 마음을 먹어 치운다. 하나님을 저주하는 자는 자신의 영혼을 저주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받는 심판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들은 죄의 씨를 심고, 그 결과 저주의 무르익은 열매를 거둔다.
17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
18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17절.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보존하는 하나님의 공의는 항상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미래에도 인과응보의 법칙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17절의 말씀은 얼마나 엄숙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지!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경고는 특히 그러하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나 도덕적인 사람, 기도하지 않으나 정직한 사람, 하나님을 믿지 않으나 은혜를 베푸는 사람, 아직 회심하지 않았으나 친절한 사람, 이들은 마귀와 그의 부리는 영들을 위해 준비한 지옥에서 공공연하게 악을 행하던 자들과 함께 지내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이 불경스럽고 방탕한 자들보다 많다. 히브리어 성경의 강력한 표현을 따라 말한다면, 지옥 맨 밑바닥에 이들이 모두 곤두박질하며 떨어질 것이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작은 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이렇게 살다가 죽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가 임하게 한다.
18절.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공의를 행하시는 것처럼, 또한 자비를 행하신다. 궁핍한 영혼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잊어버리지 않았나 하고 두려워한다. 이런 염려로 슬퍼했다면, 이제 즐거워하라.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잊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가난하여 떠는 자들에게 그들의 소망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라고 약속하셨다. “여호와의 백성은 겸손한 자들이며, 고난을 받고, 자신의 것을 빼앗기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일 나아오고, 그분께 매일 간구하며, 약속된 것을 얻고자 하는 소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기다림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19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 하소서
20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셀라)
19절. “여호와여 일어나사.” 기도는 성도들이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무기이다. 전투가 너무 치열하고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을 때면, 우리는 든든한 우군에게 구조를 요청한다. 우군은 우리가 믿음으로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부르짖으며 신호를 보낼 때까지 매복하여 숨어 있다. 우리가 전투에서 완패를 당했다 해도, 전능하신 자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면 곧 승리할 수 있다.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하나님은 부르짖는 기도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멸시하던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일어나셔서 자신의 영광을 취하는 자들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인은 심판을 당하고, 은혜의 기간 동안 회개의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자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지 못할 것이다.
20절.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사람들은 아무리 교만해진다 해도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부정할 정도로 허황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기도는 오직 소수의 교만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왕관을 쓴 자들도 결국에는 인생으로 죽는다. 학식이 많은 자들도 결국은 인생들이다. 세상을 정복한 용맹스런 장군들도 인생뿐인 자신의 존재를 더 이상 높이지 못한다. 크로수스(Crosus)의 부, 솔로몬의 지혜, 알렉산더의 권세,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유창한 언변, 이것들을 모두 모아서 한 사람에게 준다고 해도 그는 사람에 불과한 존재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자. 그래서 본문에 나온 자처럼 여호와께서 두렵게 하시는 자가 되지 말자.
이 시를 마치기 전에 구세주의 승리의 노래로 이 시를 다시 읽어 보라. 그분이 승리를 얻고 이 영광을 아버지의 발 아래 가져오는 것을 상상해 보라. 영혼의 유익이 있을 것이다. 그분의 기쁨에 동참하여 우리도 기뻐하자.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주해와 설명들]시 9편 전체. 이 노래는 우리를 변호하시며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의 언어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분은 “교회 중에 거하시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우리의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원수들에 대해 최후의 승리를 거두실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도록 가르치시며, 그분의 거룩한 산 시온에서 왕으로 다스리실 것을 말씀하신다. 4절에 나오는 원수들에 대한 승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 것을 가리키고, 마침내 재판정에 앉으신 의로우신 심판주께서 베푸실 것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전능자의 보좌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다른 분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입술에서 시작된 것임을 확실히 밝힌다. -존 프라이, B.A.(1842).
1절.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술잔의 향기로 그 안에 무슨 술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입술은 우리의 마음으로 새롭게 느끼는 하나님의 자비를 향기롭게 뿜어 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비의 그릇이라고 불리우기 때문이다. -윌리엄 카우퍼(1612).
1절.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전심으로”라는 말은 시편 기자를 구원하신 그 구원이 위대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입술로만 노래하는 천박한 자의 찬양과는 구별된 찬양이다. 어떤 사람들은 절반의 마음만으로 찬양한다. 말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이 스스로 구원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이 시편 기자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린다.
“주의 모든 기사.”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의 표증이다. 시편 기자는 그분이 보여주신 모든 기사들이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사람들이 이것을 인정할 때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전심으로 드리는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격하시키는 자들은 반쪽 마음으로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곳은 사람의 마음이며, 입은 그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헹스텐버그.
1절.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우리가 여호와께로서 특별히 좋은 것을 받았을 때는 기회 있는 대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좋다. 여인이 열 개의 은전 중에서 하나를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 그녀는 이웃과 친구들을 부르고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눅 15:9)고 소리쳤다. 우리도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친구와 친척들을 불러서 우리가 이런 저런 축복들을 받았는데,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서 받은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들을 하나님께로서 받았다는 것에 의혹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그 말을 듣고서 사람들이 비웃을 것을 의식하고 그들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우신 일들을 그의 백성들만큼 아는 자들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침묵한다면, 세상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이 행하신 것들에 대해 이미 알고 느끼는 바를 사람들에게 알리자.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분이 행하신 것들을 분명히 말하자. 하나님께 찬양을 돌릴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그것을 말할 기회가 있다는 것을 기뻐하자.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하나님은 또한 존중히 여기신다. 그분이 행하신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원한다면, 그분은 또한 우리에게 할 말이 충분하도록 선한 일을 베푸실 것이다. -파워, ‘I Wills’ of the Psalms.
1, 2절.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시편 기자는 홍수처럼 쏟아지는 지극한 애정과 환희 가운데 “감사하오며”, “전하리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찬송하리니”라고 말한다. 그는 단순히 “감사하오며”라고 말하지 않고 “전심으로” 감사하겠다고 했다. 그는 주의 “일”이라고 하지 않고 주의 “기사”라고 했으며, 또한 “모든” 기사라고 했다. 이처럼 그의 영은, 어머니 뱃속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뛰놀았던 요한처럼, 자신을 위해 위대한 일을 행하시고 그 모든 기사를 행하신 구세주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한다. 이러한 표현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사를 노래하겠다는 이 시의 주제가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왜 놀라운가? 그분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사용하셔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을 돌이키시고,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여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영광 가운데 사는 자들을 겸손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러한 일들을 이루시기 위해 어떠한 군대나 무기도 사용하지 않고, 단지 십자가의 보혈만으로 이루신다. 그러나 그가 “모든” 기사를 전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욥기에 나오는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욥 9:10)는 구절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누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사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기자가 넘치는 감정으로 이렇게 표현했다고 말할 수 있다:”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그는 하나님의 기사를 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서, 실제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기사를 전하고자 소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에는 어떤 제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바울은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바라보시기에, 사랑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또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
3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이 구절은 원수들이 돌아섰고, 패배를 당했으며, 도망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우리 성경의 번역처럼 현재 시제로 번역하면 적합하지 않다. 그렇게 하면 일관성이 없어지고, 뜻이 애매해진다. 그래서 에인즈워스는 이것을 “내 원수들이 물러갔을 때에”라고 과거 시제로 번역했다.
“주의 앞에서.” 이것은 주의 분노를 당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임재나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을 섬기고 경외하는 자에게는 은총을 나타내고, 그분을 대적하는 악한 자에게는 그분의 분노를 뜻하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시 34:16). -부스로이드(Boothroyd, 1824).
3절.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원수들이 행진 가운데 기진하거나 전투 중에 부상을 입거나 도망가다가 우연히 넘어져서 다리를 절게 되고,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며, 그래서 엎드러지고, 뒤에서 추격해 오는 자들에게 붙잡히고, 모두 넘어져서 망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헨리 해먼드.
5절. “열방을 책하시고.” 어거스틴은 이 구절을 1절에 나오는 “주의 모든 기사”와 연결시키며 영적으로 해석했다. 영적 원수인 마귀를 물러가게 하는 것처럼 놀라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께서도 “사탄아, 내 뒤로 물러서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또한 우리가 새 사람을 입기 위해 벗어 버린 옛 사람이 물러가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존 메이어.
8절.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이 심판이 시작되면, 눈물을 흘려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기도를 올려도 듣지 않으시며, 어떤 약속도 받지 않으시고, 회개해도 이미 늦었다. 세상의 부도, 존귀한 이름도, 왕권도, 면류관도 아무 쓸모가 없다. 이때에는 죄에 대한 심문은 철저하여 회개하지 않았던 것은 어떤 사소한 생각이라도, 잘못 내뱉은 말도 그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농담이 아니고 진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신다:”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아!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치 보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우상을 섬기는 자처럼 즐거워하며, 그리고 얼마나 탐욕스럽게 죄를 짓는가! 그러나 그날이 오면 이들은 놀라고, 부끄러워하고, 잠잠히 침묵할 것이다! 너의 환희와 웃음의 날이 끝나면, 그대는 영원한 암흑 가운데 던져지리라. 그리고 즐기던 쾌락 대신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되리라. -토머스 타임.
8절.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바울은 이 시편이 기록된 후, 천 년의 세월이 흘러서 아덴의 사람들에게 심판의 날에 대해 외치게 되었다. 그러나 심판의 날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는 데 이 구절보다 더 적합한 구절을 찾지 못했다. -윌리엄 플러머.
8절.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죄의식을 해결하지 못한 자들은 이 심판의 날을 견딜 수 없다. 양을 붙잡으면, 양은 울지 않는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붙잡아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양은 여기에 순복할 것이다. 그러나 돼지를 붙잡으면, 돼지는 도살당하기 전에는 붙잡힌 적이 없으므로 꽥꽥거리며 울어 댈 것이다. 이처럼 죄의식을 가진 자들은 이날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이 이날에 대해 듣는 것은 자신의 심판과 저주에 대해 듣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심판의 날이 없다면, 탐욕스러운 재판관들은 뇌물을 마음껏 거둘 것이고, 교활한 법률가들도 자신의 이익을 챙길 것이며, 고리대금업자는 이익을 두 배나 남길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얻은 재물로는 우리 죄를 대신할 수 없고, 재판관은 자신이 받은 뇌물이 어찌된 것인지 해명해야 할 것이며, 돈을 가진 자들은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때에는 죄인들은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만 결코 죽지는 않을 것이며, 영원히 불 가운데 있지만 결코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다. -헨리 스미스.
9절.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이집트 사람들은 벌레에 물려 잠을 이룰 수 없을 때에는 높은 곳에 있는 탑으로 올라가서 잠을 잔다고 한다. 그러면 벌레들은 높이 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무는 벌레들로부터 자유롭게 된다고 한다. 우리도 염려와 두려움으로 물릴 때면, 하나님의 산성으로 도망하여 그분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가운데 평안히 쉬자. -존 트랩.
10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믿음이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지성이다. 믿음이 없는 지식은 있을 수 있지만, 지식이 없는 믿음이란 있을 수 없다. 지식은 믿음에 앞서서 횃불을 밝혀야 한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딤후 1: 12). 바울이 회심할 때에 빛이 하늘로서 그의 주위를 비추었듯이(행 9:3), 믿음이 생기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빛을 비추신다. 맹목적인 믿음은 죽은 믿음처럼 나쁜 것이다. 보지 못하는 눈을 좋다고 말한다면, 지식 없는 믿음도 좋다고 할 수 있다. 무지한 가운데 보이는 열심은 저주를 받는다. 무지 가운데서도 종교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로마 교회는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 결과,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제단을 쌓게 된다. 그들은 무지는 헌신의 어머니라고 했다. 그러나 지식이 있을 때 사랑과 헌신이 따르는 것이다. 믿음에는 지식이 따라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때로 믿음을 지식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사 53:11). -토머스 왓슨.
10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불신의 어머니는 하나님과 그분의 성실하심, 자비, 그리고 능력에 대한 무지이다. 여호와를 아는 자는 여호와를 의지한다. 바울도, 아브라함도, 사라도 지식을 따른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히 10:23; 참조. 히 11:1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1). 여호와께서 값없이 약속하신 것은 확실한 것이고, 그분의 계명은 옳고 선하며, 그분의 상은 수천의 금이나 은보다 더 값진 것이다. 오, 내 영혼아! 그러므로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분을 따르라!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약속하셨다. 그분은 당신이 생각할 수도 없는 그것을 약속하셨다. 그분은 약속하신 것보다 늘 더 많은 것을 행하셨다. 그분은 악인에게도 선하게 대하시고 복을 내려 주시는 분이시다. 당신이 그분의 일을 하니, 그분은 결단코 당신을 축복하시리라. 당신에게는 영광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그분의 말씀을 붙잡으라. 결코 그 말씀에서 떨어지지 말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죽이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의 약속을 믿고 안식하라. 당신의 육체가 욕망을 탐하고, 세상이 당신을 유혹하고, 마귀가 아첨과 위협으로 당신을 시험한다 해도, 그분의 약속 위에서 안식하라. -존 볼(John Ball, 1632).
10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아는 자, 그의 백성을 향하신 그 고귀한 손길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알기까지는 결코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는 악한 사람을 결코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여호와는 우리가 신뢰할 만한 분이시다. 사람들은 그분께 기름을 붓고, 그분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고 안식을 누린다. -존 트랩.
12절.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문하시는 때가 있다. “심문하시는”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다라쉬’에서 유래한 “도레쉬”(vrd)인데 단순히 찾아내는 것을 말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묻고 찾는 것을 말한다. 아!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박해하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자들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시고 심문하실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박해자들과 폭군들은 물이 땅에 쏟아지듯 쏟아질 것이다. 스페인의 비밀 종교 재판소에서 은밀하고 철저하게 열심을 다해 조사를 했던 것보다 더욱 철저하게, 엄격하고 엄중하게 피 흘린 자들에 대한 심문이 있을 것이다. 아, 박해자들이여! 하나님께서 후퍼(Hooper), 브래드퍼드(Bradford), 테일러(Taylor), 리들리(Ridley) 등과 같은 순교자들의 피를 흘린 데에 대해 심문하시는 때가 있을 것이다. 사역자들의 입을 틀어막고 그 직책을 빼앗은 자들,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빛을 비추던 사람들을 투옥하고 추방했던 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문하실 때가 이를 것이다. 여호와의 종들을 벌주던 종교 재판소에서 일어났던 모든 행동에 대해 여호와께서 철저히 조사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핍박하던 박해자들을 심판하실 때가 이를 것이다. -토머스 브룩스.
12절.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피가 부르짖는 소리가 있다. 그런데도 “귀를 만드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시 94:9).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다. 이 땅은 잔혹함으로 가득 찼다. 쏟아진 피가 땅에서 부르짖고, 하늘에서는 이 소리를 들으시고 창문을 열고 이 땅에 분노와 심판을 쏟아부으신다. -에드워드 마베리(Edward Marbury, 1649).
12절.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하나님께서 난폭한 자의 악행을 용납하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이 흘렸던 무죄한 피와 온유하고 겸손한 자를 부당하고 무자비하게 대한 것에 대해 엄격히 보응하시는 때가 이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인의 부르짖음에 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의 부르짖음을 결코 잊지 아니하시고, 박해자들을 심판하실 적합한 때를 기다리신다. -사이먼 패트릭(Symon Patrick, D.D., 1626-1707).
12절.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여호와께서는 몸을 떨치고 일어나셔서, 이 피비린내 나는 주홍빛 죄를 처음으로 생각해 냈던 자, 기안했던 자, 그리고 임무를 수행했던 자들을 색출하시고, 그들이 흘린 피에 대해 보수하실 것이다. -윌리엄 그린힐.
12절.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기도는 파선된 배에게는 항구가 되고, 파도에 휩쓸리는 배에게는 닻이 되며, 다리를 절며 비틀거리는 자에게는 지팡이가, 가난한 자에게는 보석의 광산이, 그리고 병든 자에게는 의원이 되어 건강을 지켜 준다. 기도는 우리로 축복을 받게 하고, 우리를 덮치는 재난의 구름을 흩어 버린다. 아! 기도하는 자는 얼마나 복된 자인가! 그는 인간의 재난을 끊임없이 정복하는 정복자요, 행복의 확실한 기초를 세우는 자요, 끝없는 기쁨의 원천이며, 철학의 어머니와도 같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는 비록 극한 가난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부유하고, 결코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는 자는 비록 모든 나라들을 다스리는 왕권을 가졌다 할지라도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빈곤한 자이다. -크리소스톰.
14절.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하나님의 찬송을 전한다는 것은 열심히 일을 하는 것과도 같다. 어쩌다 생각이 날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풍성한 은혜를 지속적으로, 영원히 받는 자로서 적합한 행동이 아니다. -윌리엄 플러머.
15절.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웅덩이를 팠으나, 이것은 그들 자신의 무덤을 판 것과 같다. 그들은 계교를 부리고 악행을 일삼으며 이 땅의 재물을 모았다. 아!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파멸을 부를 음모를 꾸몄으며, 그들 머리 위에 무너질 바벨탑을 쌓고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교묘하게 음모를 꾸민다 할지라도 음모가 중의 음모가요, 그 음모를 교묘하게 수행하는 사탄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사탄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이 땅에서 얻는 영광을 부러워하지 말라. 그들은 이 땅에서 자랑하고자 하지만,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라. 시온의 딸들이 웃으며 그들을 경멸할 때가 다가온다.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지어다”(미 4:13)라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때는 그들의 원수들이 파멸에 이르는 때이다. 사울의 죽음과 함께 다윗은 구원을 받았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았을 때 애굽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음을 당했다. 교회와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은 저울의 양팔과도 같다. 한 쪽이 올라가면 다른 한 쪽은 내려간다. -리처드 십스.
15-17절. 심판을 받는 자들은, 그들이 버리지 못할 잔혹성에 비례하여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심판을 통해 상실하게 될 것이 너무 크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그들의 잔혹성이 너무 크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들이 땅에서 누렸던 쾌락과 즐거움을 기억에서 지워 버릴 수만 있다면, 이 잔혹성도 사그라질 것이며 그들이 상실한 것도 잊어버리고 아무런 고통도 없으련만······. 그들의 잔혹성, 양심, 과거의 삶에 대한 추억, 이런 것들이 모두 살아 있어서 그들에게 고통을 가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분과 함께하는 기쁨을 영원히 누려야 했건만, 이제 하나님의 진노를 마시며 그분의 임재에서 떠나 있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이키고자 그분의 사자들을 보내어 얼마나 간곡히 말씀하셨던가:”죄인들아, 네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상고해 보라. 잠깐이라도 가는 길을 멈추고 너의 종말이 어떠할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네게 주고자 하시는 영광, 네가 그처럼 받기를 거부하는 영광이 어떤 것인가 생각해 보라. 결국에는 네가 비참한 지경에 이를 것이 아니냐?” 그러나 이들은 간곡한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들이 판 웅덩이에 빠지는 날, 그들은 이 말들을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로잡으시고, 심판을 선고하시고, 진노를 쏟아부으시는 날, 그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이 세상의 쾌락에 사로잡혀 오는 세상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할 시간이 충분하여 넘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그들의 마음판에 새기게 될 것이다. 그들의 손에, 그리고 마음에 그들이 받는 영원한 형벌을 새기게 될 것이다. -리처드 백스터.
16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심판으로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려진다면, 그 심판이 어떤 심판인지 알아야 한다. 이 심판은 공개적인 심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대부분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도하는 무대에서 행해진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열린 무대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심판을 행하시는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보겠다. 첫째,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목도한 증인들이 있어서 그 심판을 기록으로 남기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후세에 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둘째, 하나님의 공의와 그것을 시행하시는 것에 대한 증인을 확보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느끼지 못하거나 여기에 순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다.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신 것이다(겔 5:6-8, 14, 15). 예루살렘은 많은 나라들 사이에 있었고, 열방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베푸신 특별하신 은혜와 특권과 구원을 목도했다. 하나님께서 이런 예루살렘을 심판하신 것은 열방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목도하게 하고, 그들도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게 하려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세계의 어느 한 구석에 처한 것이 아니었으며, 열방의 중심지에 위치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이시는 선하심과 엄위하심을 열방이 모두 똑똑히 볼 수 있었다······하나님께서는 어떤 죄인들을 공개적으로 심판하셔서 모든 사람들이 그의 고통을 목도하게 하신다. 그것은 죄인들이 행했던 그 죄악들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런 죄인들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으로 우리가 배우고, 그들이 맞는 매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그런 매를 맞지 않도록 교훈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면서 또한 은혜인 것이다······셋째, 하나님께서 악인을 공개적으로 심판하시는 것은, 이것을 바라보는 자들이 위로를 얻고 격려를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의인은 악인의 보복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시 58:10). 의인이 악인의 보복당함을 보고서 기뻐하는 것은 원수를 갚았다는 심정에서가 아니다. 이 심판은 하나님께서 죄를 이기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분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기에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을 홍해에서 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이 죽어 바닷가에 떠오르는 것을 목도했다(출 14: 30). 하나님께서 시체들을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게 하시지 않고 바닷가에 떠오르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그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무섭게 치신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도한 후에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 14:31). 하나님께서 애굽인들을 공개적으로 심판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확고해진 것이다. 애굽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매를 맞고 심판을 당한 것이다. -조셉 캐릴의 글을 요약한 것.
16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죄인들에게 심판의 손을 드실 때, 의인들은 떨며 그분의 능력과 위엄과 심판의 속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며, 자신을 판단하고 하나님을 노엽게 할 만한 일을 버린다······불이 그 주위를 비추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에 그분의 영광과 공의와 거룩함을 나타내 보인다. -윌리엄 그린힐.
16절.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죄가 죄인과 흥정을 벌이며 내놓는 것은 쾌락과 재물이다. 그러나 죄인이 치러야 할 값은 죽음과 고통과 파멸이다. 죄의 거짓됨과 속임수를 알고 싶다면 죄가 약속하는 것과 그 대가를 함께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다. -로버트 사우스(Robert South, D.D., 1633-1716).
16절.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우리의 경험에서도 악인이 그들의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히게 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본다. 성경에 나오는 하만의 이야기 외에 가장 극적인 예로서 프랑스 혁명과 관계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관련하여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여왕이 길로틴에서 죽음을 당한 후 9개월 이내에, 그녀의 죽음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도 모두 죽음을 당했다. 그녀를 고소하던 자들, 재판관들, 배심원들, 검사들, 증인들,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여왕이 죽었던 길로틴에서 사라져 갔다.” “그들이 그녀를 잡기 위해 쳐 놓은 그물에 그들 자신의 발이 걸렸고, 그녀를 빠뜨리기 위해 파 놓은 함정에 그들이 빠지고 말았다.” -바르통 부시에(Barton Bouchier, 1855).
16절. “힉가욘, 셀라.” 이 말은 에인즈워스가 “묵상, 셀라”라고 번역했던 것처럼, 이 구절을 심각하게 묵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힉가욘”은 시편 92:1-3에 “십현금과 비파와 ‘힉가욘’의 정숙한 소리”라는 구절에 다시 나타난다. 다른 악기와 함께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악기 중 하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존 메이어.
17절.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악인은 죽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 나는 에티오피아에 있는 천연 자석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이 자석에는 두 개의 면이 있는데, 한 면으로는 철을 잡아당기고, 다른 면으로는 철을 밀어낸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두 개의 손, 즉 자비의 손과 공의의 손을 가지고 계신다. 한 손으로는 의인을 천국으로 이끄시고, 다른 손으로는 죄인을 지옥으로 밀쳐내신다. 아! 그 지옥은 얼마나 두려운 곳인지! 그곳은 불못이라고 불리운다(계 20:15). 지옥을 불못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옥이 고통의 장소이며, 이 고통이 극심할 것을 의미한다. 불은 사람을 가장 괴롭게 고문하는 데 사용된다. 스트라보(Strabo)는 그의 지리책에 갈릴리에 있는 연못에 대해 기록했다. 이 연못은 전염성이 있어서 거기에 던져진 것은 무엇이든지 화상을 입어 껍질이 벗겨진다고 했다. 그러나 이 연못도 저주받은 자들을 던지는 불못과 비교하면 시원한 곳이다. 이 불못이 왜 끔찍한 것인가? 이 불못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1) 이 못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다(계 21:8). 그러므로 냄새도 지독하고 숨이 막히는 곳이다. (2) 이 불은 꺼지지 않는 불이다. 악인이 숨이 막힌다 해도 결코 소멸되지는 않는다:”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죄인이, 오는 세상에서 얼마나 참혹한 상황에 처하는가를 보라. 그들은 결코 죽지 않고 영원토록 고통을 당한다. 이것을 생각하면 죄인들이 지옥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맛보기를 결심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죄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지 않겠는가? -토머스 왓슨.
17절.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여기서 “악인”이란 누구든지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이 사람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마땅히 가져야 할 사랑이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고, 기쁨도 없으며, 하나님을 자주 생각하지도 않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과 악인은 같은 말이다.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은 이 말을 잘 증명해 줄 것이다.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제외하는 것이며, 가장 사악한 것을 포함시키는 것이기에 이는 악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을 제외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분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가치관이 없다는 말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행복이나 능력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께 순종하지도 않으며,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또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는 악한 사람임에 틀림없다······하나님을 우리의 생각 속에서 밀어내 버리고, 그분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시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는 것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악한 일이다. 이런 사람은 술 취하고, 맹세하고, 속이고, 사람을 압제한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고, 돌이킬 수 없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 -존 하우(John Howe, 1630-1705).
17절.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음부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리숄라”(hlwavl)는 지옥으로 직행한다는 말이다. 원어에는 이런 뜻이 강조되어 있다. -아담 클라크.
17절.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 모든 악은 지옥에서 온 악인과 함께 발생한 것이다. 악은 다시 지옥으로 보내질 것이며, 악을 행하던 악인도 고통의 장소로 되돌려지고, 거기서 영원히 갇혀 있게 된다. 열방이나, 열방을 구성하고 있는 개인이나 그들의 상태는 한 가지 기준에 따라 평가될 것이다. 이 기준은 하나님을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기억하는지를 말한다. 그분을 기억하는 것은 모든 덕이 흘러나오는 샘과 같고, 그분을 잊어버리는 것은 악의 근원과 같다. -조지 혼.
17절.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음부,
그곳은 악인의 거처
꺼지지 않는 불이 가득 찬 곳
저주와 고통의 집.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
17절.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음부란
행할 능력이 없는 의지
무슨 일이나 자신의 머리로 돌리는 곳
아! 끔찍한 고독
이기적인 사랑이 그에 합당한 열매를 거두는 곳
악의와 조소 띤 입술
살기 가득한 눈길
그러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또한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곳
흑암의 깊은 어둠 속에 홀로 갇힌 구덩이
채우지 못하는 욕망
비탄의 눈물을 삼키는 슬픔
누구나 혼자만 갇혀 있는 곳
증오가 자신을 삼키고
발목의 사슬은 육신을 뚫고 영혼까지 할퀴네
죽음 같은 고독
모두 미쳐 버린 곳
아무도 없는 칠흑 같은 감옥
누구도 고통을 어루만지며 위로해 주지 않는 곳.
-헤로드(J. A. Heraud).
18절.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감미로운 약속이다. 주님은 모든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분 자신이 성경에 약속된 위대한 약속이다. 그분의 이름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간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다. 아멘. -로버트 호커(Robert Hawker, D.D., 1820).
18절.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이방인들도 새가 매를 피하여 그들의 가슴으로 숨어들면, “네가 나를 피난처로 삼아 날아들었으니, 내가 너를 네 원수에게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숨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원수에게 내어주시겠는가? 이렇게 기도하라:”여호와여, 나는 유혹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욕망에게 쫓기나이다. 당신께서 나를 용서하지 않으시면, 나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나이다. 이것들을 죽여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것들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나이다. 그리스도를 보시고 나를 당신의 사랑의 품으로 받아 주소서. 당신의 영원한 팔로 나를 숨기소서. 나를 구하실 능력이 당신께 있사오니, 나를 원수들에게 내놓지 마소서.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없고, 다른 사람들도 믿을 수 없나이다. 오직 당신만을 믿고, 당신만을 의지하나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혼을 보호하신다. 그분은 이처럼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피하는 자를 위로하실 것이라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맹세하셨다:”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히 6:17). 이것은 성도들로 더욱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피하면 그분이 따뜻하게 영접해 주실 것을 기대하게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과 약속을 견고한 성처럼 세워 주셨다. 이 하나님의 이름과 약속이 그분의 백성들로 그곳에 들어가 숨게 한다. -윌리엄 거놀.
18절.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심으로써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경우가 있다. 크리소스톰은 이것을 장기 예금에 비유했다. 돈을 은행에 오랫동안 예금해 놓을수록 이자는 더 불어난다. 우리는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사람에게 돈을 맡기고 기다리는데, 또한 더 큰 것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으심으로 우리가 더 많은 기도를 드리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더 많은 기도를 하고, 더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우리는 더 많은 위로를 받고, 결국 더 많은 것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는 것과 연기하시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이 한이 없는 분이시다. 이 사랑은 무한하다. 그분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기를 늦추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도 자녀들이 구하는 것을 주기로 작정하고서도 즉각적으로 주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아이들이 가장 잘 준비되었을 때, 그때에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우리는 아이들이 기다림을 배우기를 바라지 않는가? 어머니가 그의 외아들을 잊어버린다 해도, 하나님은 결코 잊으실 수 없고, 잊지도 않으신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결코! -리처드 캐플(Richard Capel).
19절. “여호와여 일어나사.” 이 구절은 무슨 뜻인가? 시편 기자는 원수들을 저주하며 그들이 파멸당할 것을 기도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이 말은 원수들에게 불행한 일이 임할 것을 바라는 자의 기도가 아니다. 이것은 원수들의 죄로 인해서 그들에게 악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는 선지자의 언어이다. -어거스틴.
20절.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나 된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죄성이 강하여 이것을 강력하게 억제할 필요가 있으며, 하나님을 향해 교만한 마음으로 부풀어 있어서 이 타락한 것들이 사라지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육체에 가시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징계는 우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여호와의 자비가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셨으나, 우리로 겸손케 하기 위해 목에 고삐를 걸게 하신다. -스티븐 차녹.
20절.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인생”을 히브리 원어로 “에노쉬”(vwna)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사람들은 비참하고 약하며 결국에는 죽게 되는 존재인 것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이 단어는 단수이지만 집합적인 의미로 쓰였다. -존 칼빈.
[설교힌트]1절. (1)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한 분-“여호와께.” (2) 풍성한 찬양-“주의 모든 기사.” (3) 찬양의 합당한 특성-“전심으로.” -데이비스(B. Davies).
1절.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우리가 영원히 할 일, 그리고 영원한 기쁨.
1절. “주의 모든 기사.” 창조, 섭리, 구속, 이것들은 놀라운 기사이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가 기뻐할 만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낸다. 설교 제목으로 적합하다.
2절. 거룩한 찬송과 거룩한 기쁨. 거룩한 즐거움의 의무, 아름다움, 그리고 근거.
4절. (1) 의인의 권리는 공격을 당한다. (2) 의인의 권리는 보호를 받는다.
6절. (1) 대원수. (2) 그가 행한 파멸. (3) 원수를 이기는 방법. (4) 이어서 나오는 안식.
7절 상반절. 하나님의 영원하심, 성도들의 위로, 죄인의 두려움.
8절. 하나님 나라의 공의, 특히 마지막 심판의 날에 있을 공의.
9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기, 온전한 구원.
10절. (1) 가장 중요한 지식-“주의 이름을 아는 자.” (2) 축복된 결과-“주를 의지하오리니.” (3) 충분한 이유-“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메드허스트(T. W. Medhurst).
지식, 믿음, 체험, 이 세 가지의 연관성.
10절. 여호와의 이름은 우리로 그분을 의지하게 한다. 여호와 이레, 찌드케누, 라파, 삼마, 샬롬, 닛시, 엘로힘, 샤다이, 아도나이.
11절. (1) 시온, 이것은 무엇인가? (2) 시온의 영광스러운 거주자,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3) 시온의 백성들이 하는 두 가지 일-“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4)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께 두 가지 의무를 수행하는 이유.
12절. (1) 무서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2) 그분의 백성들을 기억하시는 하나님-구원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시고, 축복하시고, 원수를 갚아 주시기 위해. (3)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그들을 구원하시고 원수들을 넘어지게 하신다. 전쟁과 질병이 만연한 시대에 위로의 설교가 된다.
13절.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가 드릴 세리의 기도.
13절.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흑암의 절망, 위대한 구원, 영광스러운 높임.
14절.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오, 하나님이여, 이 구원은 “주의” 구원이므로 주를 높이나이다. 이 구원은 값없는 구원이며, 온전하고, 적합하고, 확실하고, 영원한 구원이다. 누가 기뻐할 수 있는가? 왜 그들이 항상 그렇게 해야 하는가?
15절. 기억할 만한 사건들.
16절. 무서운 사실. 10절과 비교해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무서운 대안.
17절.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에게 주는 경고.
18절. 구원의 지체. (1) 불신자의 생각-“잊어버림.” (2) 하나님의 약속-“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 (3) 믿음의 의무-“기다림.”
19절.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힘있는 간구, 성경에 나타난 예들, 이 기도가 힘이 있는 이유, 이 기도를 드리는 시기.
20절. 사람이 배워야 할 교훈. 하나님은 이 교훈을 어떻게 가르치시는가?
시편 9,Psalm 9 KLB;NIV
Copyright © 1985 by Biblica, Inc.® Used by permission. All rights reserved worldwide.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Copyright ©1973, 1978, 1984, 2011 by Biblica, Inc.® Used by permission. All rights reserved worldwide.
NIV Reverse Interlinear Bible: English to Hebrew and English to Greek. Copyright © 2019 by Zondervan.
[설교를 위한 단상] 시편 9편 1절 – 20절 나의 요새이신 하나님(18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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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 시편 9편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셨음을 고백하며 그 은혜에 감사의 찬송을 올려 드리는 시이다.
2. 본문에서 시인은 과거에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며(4절), 현재 자신의 고통을 돌아봐 주실 것을 간구하며(12절), 미래에 인생과 이방 나라에 심판을 내려 달라(19절) 간구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우리의 책임자는 하나님이시다.
3. 특히 인생은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 이 땅에 하나님과 비교할 존재는 없기에, 우리의 유일한 요새는 하나님 뿐이시다.
4. 내가 약하기에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자.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따라 판단이 흐려질 수 있지만, 공의의 하나님은 가장 정확하고 공의롭게 모든 것을 판단하신다.
찬송가 183장, 빈 들의 마른 풀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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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1-20, 개역개정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뭇랍벤에 맞춘 노래]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2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3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5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6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7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9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1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12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13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14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5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16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힉가욘, 셀라)
17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18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19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20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나의 요새이신 하나님
사무엘하 10장에는, 다윗이 이끄는 이스라엘과 암몬 족속의 전쟁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전쟁이 있기 전, 암몬의 왕인 나하스가 죽자 다윗이 조문단을 보냅니다. 과거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나하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은혜를 기억하며 자신을 도와 주었던 나하스의 죽음을 슬퍼하며 조문단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나하스의 아들인 하눈은 다윗이 보낸 조문단을 모욕하고 쫓아 버립니다. 그리고 적반하장격으로 군사를 일으키고 주변 국가들까지 연합해서 다윗과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결국 승리하게 되는데, 그 승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음을 다윗이 고백합니다. 선의를 악의로 갚으려던 암몬 왕 하눈을 공의의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였다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은 분명 선의를 베풀었는데, 이유 없이 공격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였던 다윗의 상황을 오늘 본문이 잘 표현합니다. 4절에서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라고 다윗이 고백합니다. 다윗은 억울하게 전쟁을 치뤄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아셨기에 의롭게 심판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재판관들은 자신의 생각과 이해 관계에 따라 올바른 재판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신명기 24장을 통해 객이나 고아의 송사, 즉 재판을 억울하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지만(신 24:17), 선지자 사무엘의 아들들조차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즉 올바른 재판을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일반 재판관들이야 얼마나 정의롭게 재판하였겠습니까?
사람의 재판은 정의롭지 못할 수도 있으나, 우리 하나님은 공의로 재판하십니다. 오늘 다윗은 공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맡기고 있습니다.
특별히 다윗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베푸신 공의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4절을 통해, 다윗은 과거 암몬과의 전쟁 속에서 하나님께서 의롭게 심판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12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지금 현재 가난한 자, 고통 중에 있는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시고 계시다고 노래합니다. 또한 19절을 통해 공의의 하나님께서 미래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생들과 이방 나라들에 심판을 내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의 요새였습니다. 9절에서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요새란, ‘미스가브'(מִשׂגָּב)로 히브리어 성경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짐승이나 적이 올라올 수 없는 아주 높은 성이나 망대를 의미합니다. 나를 괴롭히려는 대적이 칼을 휘두르며 나를 붙잡으려 이빨을 드러내고 쫓아 와도, 높은 망대인 ‘미스가브’가 되시는 하나님께 피할 때, 우리의 대적이 결코 우리를 건드릴 수 없으며, 우리는 완전하게 보호 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억울할 일을 당할 때, 고통 중에 있을 때,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때 다윗이 피할 높은 요새는 오직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요새가 되시는 다윗의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억울하고 답답한 일을 겪고 있습니까? 공의의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십시오. 괴롭고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높은 요새되신 하나님께 피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답답한 마음에 평강을 주시며, 곤란한 우리의 영혼에 안식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피하는 복된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지치고 상한 우리가 이 새벽에 나와 하나님께 기도하며 주님께 피합니다. 우리의 높은 망대요 요새가 되어 주시어서, 곤란함과 힘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를 숨겨 주옵소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게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주기도
1. 나라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지역 감염자가 생겨나고 있는 이 때, 온 국민이 다시 한 마음으로 사회적 방역에 힘쓰는 지혜로운 나라 되게 하소서. 위정자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주소서.
2. 우리 민족이 복음으로 하나되며, 남북이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쓰임 받게 하옵소서.
3. 세계 선교를 위해 기도합니다. 세계 각 지역과 오지에 나가 있는 선교사님들을 지켜 주시고, 그 가정을 책임져 주옵소서.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옵소서.
4. 교회와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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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4월 5일. 시편 9편. > 매일말씀묵상
(아래 관련링크 클릭하여 드라마바이블을 들으면서 묵상하면 더욱 도움이 됩니다. )
시편 9편. 네가 인생임을 알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라.
1. 9 편은 승리를 노래하는 감사의 시입니다 . 어떤 승리입니까? 불의하게 자신의 피를 흘리게 하려는 원수들(12), 자신을 미워하는 대적들 앞에 있는(13) 다윗은 거의 사망의 문에 이른 듯 보입니다(13). 그들은 다윗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웅덩이(함정)를 팠고 그물을 쳤습니다(15). 다윗은 불의한 자들에게 억울하게 송사를 당하고 있습니다(4). 다윗은 이 모든 상황에서의 승리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 다윗은 ‘ 감사하며 ’ ‘ 전하며 ’, ‘ 기뻐하고 ’ ‘ 즐거워하며 ’ ‘ 찬송합니다 .’(1~2). 다윗의 찬양과 고백과 간증은 자기 삶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적인 고백입니다 . 자신을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님을 경험한 다윗은, 딸 시온의 문에서(‘딸 시온’은 예루살렘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주의 구원을 기뻐하며 주의 찬송을 다 전하겠다고 말합니다(14). 항상 그리스도인의 삶이 1,2절과 같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때때로 이런 복된 경험을 주십니다. 당신은 지금 이런 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2. ‘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다 (4)’ 는 말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나는 내 권리를 잃지 않는다는 확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늘 보좌에 계시고 우리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고 변호하십니다. 이것이 성도의 위로이며 자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명예를 위하여 우리를 지키시니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종종 우리 자신을 속이고 우리의 이익(명예)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름을 내지 말고 명분을 걸지 말고, 조용히 하나님을 섬기고 겸손히 행하다 보면 ,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나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볼 것입니다 .
3. 7-12절은 과거 시제에서 미래 시제로, 개인의 문제에서 세계의 문제로 옮겨갑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지만(7~8)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자비와 은혜를 나타내십니다(9~12). ‘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8)’ 라는 말은 사람의 법정에서야 어찌 되든, 하늘 보좌에서는 공의로 심판한다는 확신을 표현합니다. 다윗은 공의로 판단하시는 위대한 왕의 법정에 설 것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얻습니다. 성도는 이 공의의 법정을 생각할 때 모든 비방 속에서도 위로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압제 당한 자의 산성이 되시고(9) 주의 이름을 알고 그를 의지하고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시며(10),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무서운 심판자시지만 자기 백성을 기억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12).
4. “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10).”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최고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빛 가운데 있기에 불신의 악심을 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 체험은 영혼의 닻 같아서 시련과 고난의 시간에도 방황하지 않게 합니다. 믿음은 은혜로 주어진 지성입니다. 믿음 없는 지식은 있을 수 있지만 지식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해의 빛을 비추십니다. 지식 없는 맹목적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지식 없는 믿음은 보지 못하는 눈과 같습니다. 무지한 열심은 저주를 받습니다. 때로 성경은 믿음을 지식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자는 여호와를 의지합니다. 바울도, 아브라함도, 사라도 지식을 따른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5. “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14).”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찬송을 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주님의 행하신 일과 주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너무나 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 제가 형식적으로나 의무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도록 제 마음 깊은 데서 터져 나오는 감격으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저를 언제나 사망의 문에서 일으켜 주시옵소서.” 이 기도가 마음에 있는 자는 참으로 복을 경험하고 누리는 인생입니다. 이런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며 얼마나 선하신지 알고, 평생 그분을 말하고 선포하고 전도하며 사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6. 다윗은 열방과 개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에 떨어지는지를 보았습니다(15~16). 그리고 장래 공의의 심판과 더불어 나타날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17~18). 그날이 어떤 이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은혜의 날이 될 것입니다. 다윗은 마지막 기도를 드립니다 (19~20). 그는 모두가 자신이 인생일 뿐임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 여기서 인생은 히브리어 단어 ‘에노쉬’인데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 을 가리킵니다. 기도는 연약한 인생인 성도들이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무기입니다. 전투가 너무 치열하여 도저히 이길 수 없을 때, 우리는 든든한 우군에게 구조를 요청합니다. 우군은 우리가 믿음으로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부르짖어 신호를 보낼 때까지 매복하여 숨어 있습니다. 전투에서 완패를 당해도 전능하신 자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7. 사람의 인생이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일 뿐이라는 사실과 ,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누가 하나님을 찾지 않겠습니까 ?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인생이 인생일 뿐이라는 사실을, 마지막 심판 날에 가서야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인생이 인생일 뿐이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까 ? 다윗은 그것을 배웠고 알았습니다 . 오늘은 당신이 그것을 알고 깨달아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도 살아가는 복된 은혜를 구하십시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온갖 억울하고 힘든 일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는 날이 있다는 사실로, 위로와 평안을 얻게 하시고, 저희 평생에 만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저희의 인생 됨을 점점 더 깊이 알게 하셔서,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 위에서 저희의 믿음이 자라가고 주를 더 깊이 의지하며 신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키워드에 대한 정보 시편 9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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